목차
1.신종코로나 확산 현황
2.[천자 칼럼] '오스카 영광'의 숨은 주역들
3.“중국군이 미 신용평가회사 해킹…1억4700만명 개인정보 절취”
4.콜럼버스 보다500년 앞서 바이킹, 아메리카에 상륙했다.
1.신종코로나 확산 현황
국내 발생현황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국내 발생 현황 (2.12일 09시 기준)
- (확진환자) 28명
- (확진환자 격리해제) 4명
- (검사진행) 992명
국외 발생현황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환자 총 45,097명(사망 1,115) 보고(2.12일 09시 기준)
- (중국) 44,653명(사망 1,113)
- (아시아) 홍콩 49명(사망 1), 대만 18명, 마카오 10명, 태국 33명, 싱가포르 45명, 일본 26명, 베트남 15명, 네팔 1명, 말레이시아 18명, 캄보디아 1명, 스리랑카 1명, 아랍에미리트 8명, 인도3명, 필리핀 3명(사망 1)
- (아메리카) 미국 13명, 캐나다 7명
- (유럽) 프랑스 11명, 독일 14명, 핀란드 1명, 이탈리아 3명, 영국 8명, 러시아 2명, 스웨덴 1명, 스페인 2명, 벨기에 1명
- (오세아니아) 호주 15명
- (기타) 일본 크루즈 135명
2.[천자 칼럼] '오스카 영광'의 숨은 주역들 (전체기사 읽기추천)
“이젠 문화야. 그게 우리의 미래야. 멀티플렉스도 짓고 영화도 직접 제작하고…. 아시아의 할리우드가 되자는 거지.” 1995년 3월 이재현 CJ그룹 회장(당시 제일제당 상무)이 누나인 이미경 CJ 부회장(당시 이사)과 미국행 비행기에서 나눈 대화다. 삼성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그때 이 회장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국 제작사 드림웍스에 3억달러(약 3564억원)를 투자하며 아시아 배급권을 따냈다.
그는 1998년 국내 첫 멀티플렉스 CGV를 선보이고 2000년 영화 배급투자사 CJ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는 등 25년간 7조5000억원을 투자했다. 문화산업에 대한 그의 집념은 할아버지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사업보국(事業報國)’ 철학에서 나왔다. 그는 2011년 여러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CJ ENM으로 통합하고 ‘사업보국’의 영역을 해외로 넓혔다.
그가 한국 영화산업 육성의 ‘전략가’라면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은 ‘실행가’였다. 이 부회장은 300편이 넘는 영화에 투자하면서 ‘K무비’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봉준호 감독을 지원하며 ‘살인의 추억’ ‘마더’ ‘설국열차’ 등 4편을 함께 만들었다. 칸영화제와 골든글로브에 이어 아카데미(오스카) 4관왕을 휩쓴 ‘기생충’에는 책임프로듀서로 동참했다.
하버드대학원 출신으로 할리우드 인맥까지 탄탄한 그는 2017년 아카데미상 선정위원인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이 됐다. 칸영화제가 심사위원 10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과 달리 아카데미상은 AMPAS 회원 8400명의 투표로 결정된다. 그는 지난해부터 전 세계를 돌며 ‘AMPAS 시사회’를 열고 리셉션, 파티까지 주도했다.
이들만이 아니다. ‘기생충’의 영어 자막을 맡은 달시 파켓은 극중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어 끓인 라면)를 라면과 우동을 합친 ‘람동(ramdong)’으로 옮기고,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건 없냐”는 대사의 서울대를 옥스퍼드로 바꿔 외국인의 공감을 자아냈다. 시놉시스만 보고 흔쾌히 제작을 맡은 바른손E&A의 곽신애 대표도 ‘숨은 주역’이다.
이들 덕분에 ‘기생충’은 ‘오스카의 영광’뿐만 아니라 세계 40개국에서 1억2970만달러(약 1500억원)의 극장 수입까지 올렸다. ‘1000만 흥행’의 주역인 한국 관객들과 디테일의 힘을 보여준 ‘봉테일 사단’의 저력에도 경의를 표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3.“중국군이 미 신용평가회사 해킹…1억4700만명 개인정보 절취”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927755.html
4.콜럼버스 보다500년 앞서 바이킹, 아메리카에 상륙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950년대에 스웨덴 스톡홀름 서쪽 멜라렌(Mälaren)섬에 위치한 헬괴(Helgö)에서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은 놀라운 유물들을 찾아냈다. 그중에는 6세기에 인도 북부에서 만들어진 작은 불상도 있다. 부처님은 어떤 연유로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연구자들은 아마도 아시아에서 찾아온 어느 여행자가 안전을 기원하느라 이 불상을 일종의 수호신으로 지니고 다녔을 것으로 본다. 헬괴에서는 또한 이집트의 콥트(기독교 일파) 교도가 사용한 세례용 국자, 아일랜드의 주교 지팡이, 동로마제국의 금화(solidi)도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성스러운 섬'을 뜻하는 헬괴는 기독교 이전 이교(異敎)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상품 거래 중심지였다. 유럽 북단의 스칸디나비아와 발트해 연안 지역은 고립된 곳이 아니었으며, 아주 이른 시기부터 유라시아 대륙 내 광범위한 원거리 교류 네트워크에 포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다른 지역과 문화적·경제적 접촉을 해 왔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청동 재료와 청동기 제품은 멀리 중부 유럽과 영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대신 가죽, 모피 같은 특산물을 수출했을 것이다. 북유럽 산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호박(琥珀)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나 로마인들 모두 발트 지역에서 나는 호박 제품을 좋아해서 상인들이 북유럽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집했다. 터키 남부 울루부룬(Uluburun) 근처 바다에서 발견된 기원전 14세기의 침몰선에서 호박 제품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런 점을 말해 준다.
스웨덴에서 발견된 인도 6세기 불상
오랜 기간 비교적 평화로운 교류를 하던 시기가 마감되고 서기 8세기 중엽부터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돌연 폭력적으로 해외로 나가는 바이킹의 시대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웃 지역으로 배를 타고 가서 약탈하고 돌아오는 방식이었다가, 점차 현지에 정착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극히 먼 지역까지 찾아가서 교역을 하는 식으로 발전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해외로 나갔는지 정확한 통계를 구하기는 힘들다. 노르웨이 지역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전체 인구의 8% 정도가 해외로 나갔으리라 추산한다. 8%라면 결코 낮은 숫자가 아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갑자기 바다로 나갔을까? 이 또한 정확한 답을 구하기는 힘들다. 인구 과잉과 그에 따른 농토 부족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고, 호전적 엘리트 집단 간의 갈등이 있었으리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선 서기 1000년쯤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으로 알려진 바이킹 에릭손(Leif Erikson·970~1020) 일행이 원주민 인디언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당시 바이킹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지금의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도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엥거스 맥브리이드 作
(왼쪽)스웨덴 스톡홀름 서쪽 멜라렌섬의 헬괴(Helgö)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6세기 인도 북부에서 만들어진 불상. (중간)노르웨이 오슬로 바이킹 박물관에 있는 곡스타드 선박. 32명이 노를 저을 수 있는 이 배는 현재 보존된 바이킹 선박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오른쪽)8~9세기에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 지역으로 습격하는 바이킹의 모습. /위키피디아
바이킹이 사용한 배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척되었다. 항해 중에 침몰한 배, 혹은 권력자가 죽었을 때 장례용으로 침몰시킨 배를 건져내서 연구하는 해양고고학 덕분에 당시의 선박과 항해뿐 아니라 사회와 경제, 문화 일반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졌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노르웨이의 곡스타드(Gokstad)에서 건져 올린 배를 들 수 있다. 길이 23.80m, 폭 5.1m 크기에 110㎡의 돛을 달고 32명이 노를 젓는 이 배는 현재 보존된 바이킹 선박 중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 배는 전투, 교역, 사람과 상품 이송에 두루 사용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 똑같이 복제한 '바이킹' 호로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떠나 시카고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하여 바이킹 시대에 북아메리카까지 오가는 항해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편 발트해를 넘어 러시아와 비잔틴 방향으로 가는 배는 작고 가벼운 보트로서 강이나 호수 위를 오가는 용이었다. 러시아의 강을 타고 내려가다가 강이 끊어지거나 폭포를 만나 더 이상 항행이 불가능할 때에는 다음 수로를 만날 때까지 배를 들거나 끌어서 옮기는 연수육로(連水陸路·portage) 방식으로 이동해야 했으므로, 이런 배들은 길이 6~8m 정도의 소형이었다.
1980년대 후반 고틀란드섬의 팅스태데(Tingstäde)에서 발견된 배를 복제해서 실험 항행을 한 적이 있는데, 약 3개월 걸려 러시아의 강을 따라 내려간 후 이스탄불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바이킹의 남동쪽 모험 가능성 역시 확인되었다.
아메리카에도 식민지 건설한 바이킹
바이킹이라 하면 대체로 바다를 가로질러 해안 지역으로 습격해 들어가서 약탈·방화·살인을 저지른 후 도주하는 건장한 야만인을 떠올린다. 대략 8~9세기에, 특히 영국과 프랑스 지역을 공격할 당시에는 이런 이미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최초의 약탈 행위 사례로 꼽히는 사례가 793년 영국 북동 해안의 린디스판섬 수도원 공격인데, 이 당시 만행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잘 나와 있다. 살해한 사람 머리를 잘라 꼬챙이 꿰어서 들고 다니는 정도니 당시 영국인들은 말세에 이르러 북쪽의 악마들이 용과 함께 들이닥친 것이라고 해석했다.
북유럽 사람들이 술 마실 때 건배사로 사용하는 '스콜'이라는 말은 바이킹들이 적의 두개골(skull)에 술을 따라 마시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바이킹의 약탈적 성격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단순히 폭력적인 침략자 정도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이해 방식이다.
바이킹의 활동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면 이보다 스케일이 훨씬 장대하고, 팽창의 방향도 다채로우며, 단순히 약탈 행위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에 이르는 소위 '바이킹의 시대'에 이들의 팽창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남서쪽 방향으로는 영국, 프랑스 해안을 침략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그 범위가 확대되어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북서쪽 방향으로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여 한때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적도 있다(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선다). 남동쪽으로는 러시아를 넘어 비잔틴 제국에 이르렀고, 어쩌면 아라비아, 심지어 인도와 중국에까지 도달했을 가능성을 거론하는 학자도 있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 서부 해안 지역에 정착하여 노르망디(Normandie) 주가 형성되었고, 이들이 영국을 점령해서 노르만 왕조를 개창했다.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점령하여 새 왕조를 열고, 지중해 동부 지역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의 국가 건설 과정에도 바이킹들이 깊이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 현상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앞으로 이 사건들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갓난아이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곳은 세계 대양의 맨 끝에 위치해 있는 큰 도시이다. 시내에는 맑은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시리우스 별을 숭배하지만 소수 기독교도가 있어서 따로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신께 희생 동물을 바치려는 사람은 문 앞에 장대를 꽂고 그 위에 자기가 잡은 소, 양, 염소, 돼지 같은 동물을 꽂아서, 이웃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도록 한다. 이곳에는 재산이나 보물이 많지 않다. 주민들의 주요 식량인 생선은 아주 풍부하게 잡힌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갓난아이를 키우기보다 흔히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혼할 권리는 여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사항이 있다. 나는 이곳 사람들보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이 하는 노래는 목구멍에서 끄집어내는 툴툴거리는 소음인데, 개 짖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개 소리보다도 더 짐승 같다."
독일 슐레스비히 남쪽 헤데비(Hedeby)에 복원된 바이킹 마을. /위키피디아
10세기 후반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자 알 타르투시(Al-Tartushi)가 슐레스비히 남쪽의 헤데비(Hedeby)에 대해 남긴 기록이다. 헤데비(독일어 자료에서는 하이타부(Haithabu)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바이킹 중개 도시였지만, 이보다 훨씬 부유하고 세련된 지역 출신인 알 타르투시가 보기에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보면 성채로 둘러싸인 시 면적은 최대 24㏊이고 인구는 약 1500명 정도로 추산되니 실제 규모는 마을 수준이다. 그의 생생한 서술 내용으로 판단해 보건대, 헤데비의 주민 대부분은 이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독교 전도가 막 시작되었으며, 원시적인 인구 조절법인 기아(棄兒)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11/20200211040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