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선교의 아버지 민노아 선교사 … 33년간 청주서 복음·교육 헌신
민노아 선교사가 세운 청주 탑동의 6개 양관은 모두 충북유형문화재 133호로 지정됐다. 사진은 3호 양관 민노아 기념관으로 충북 최초의 선교사 민노아(F. S. Miller)가 살았던 집이다.
민노아 선교사가 세운 청주 탑동의 6개 양관은 모두 충북유형문화재 133호로 지정됐다. 사진은 3호 양관 민노아 기념관으로 충북 최초의 선교사 민노아(F. S. Miller)가 살았던 집이다.
청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오래 존재해온 건물이 있다. 청주 탑동 양관이다. 양관(洋館)은 말 그대로 서양식 집(건물)이라는 뜻이다. 상당구 탑동 일신여중고 언덕에 서 있는 이들 건물은 청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청주의 상징이자 추억의 장소이고, 자랑거리였다.
지금은 학교와 단독주택,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지만 70-80년 대까지만 해도 눈에 잘 띄는 이색적인 건물이었다. 화강암 기단석에 붉은 벽돌, 기와지붕을 한 동서양 융합 스타일의 건물로 건축사적 의미도 클 뿐 아니라 외양도 매우 아름답다. 1906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워진 6동의 건물 모두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청주에 양관을 짓고 평생 충북에서 기독교 전파와 근대교육, 의료봉사, 계몽운동을 벌인 사람이 미국 출신 민노아 선교사이다.
'충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민노아(Frederick S. Miller 1866-1937)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1892년 한국으로 파송돼 45년간 선교활동을 했으며, 죽은 뒤 그가 사랑한 청주에 묻혔다. 조선에 건너온 뒤 초기 12년 동안 서울에서 복음을 전했고, 33년 간은 청주를 중심으로 충북 지역을 돌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평생을 청주에서 보낸 '청주 사람 민노아'인 것이다.
민노아는 1893년 미국 북장로회가 파견, 한국에 입국했다. 사진은 이듬해 1894년 선교사와 가족들 모임. 오른쪽 원내가 민노아와 그의 부인 안나 레이네크 밀러이다.
민노아는 1893년 미국 북장로회가 파견, 한국에 입국했다. 사진은 이듬해 1894년 선교사와 가족들 모임. 오른쪽 원내가 민노아와 그의 부인 안나 레이네크 밀러이다.
민노아 선교사가 1983-87년 서울 정동에서 운영한 민노아학당의 학생과 미국인 선교사, 한국인 교사들.
민노아는 1866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웨스턴펜실베니아대학(피츠버그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고 1892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 국내 뿐 아니라 해외선교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학생자원선교운동(SVM)이 불길처럼 번졌다. 민노아는 해외 복음전파를 꿈꿨고,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1892년 11월 아내 안나 레이네크 밀러(Anna R. Miller)와 함께 조선으로 파송됐다.
민노아는 입국 초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남부권을 맡아 선교활동을 벌였다. 1893년 언더우드가 운영하던 예수교학당의 제3대 학당장을 맡았다. 이름을 민노아학당으로 바꾸고 기독교와 실용교육을 실시했으며, 아내 안나 여사는 주일학교 소년반을 담당했다.
청주제일교회 안에 설립자 민노아 흉상이 세워져 있다.
당시 민노아학당에서 공부한 학생 중의 하나가 도산 안창호이다. 안창호는 3년간 이 학교에서 배운 뒤 반년 동안 조교로 근무했다. 민노아는 총명하고 부지런한 안창호를 눈여겨보고 미국 유학을 주선해줬다. 도산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계몽운동가, 교육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다.
그러나 미국의 장로교본부는 교육보다는 복음선교에 치중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교육보다 복음전파가 더 긴급하고, 한국에 교육을 담당할 인물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민노아는 학당이 폐쇄되자 장로교 선교부 회계, 미국 북장로교 조선선교부 의장, 한국 상임 성서 실행위원회 회장직 등을 수행했다.
민노아는 서울과 경기남부 지역 순회선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회고록에 "나의 첫 번째 사역지는 평안도 접경에서 충청도 접경에 이르는 곳으로, 걸어서 7일 나귀로 4일이 걸리는 거리였다."고 적었다. 서울 동남쪽의 원주, 강원도 동해안을 비롯 경기도 남부의 여주, 이천, 죽산, 안성, 청주 등을 돌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1894년 경기도 용인에 용인 최초의 교회인 갓골교회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연동교회를 설립했다.
민노아는 충청도와 가까운 경기도 안성의 죽산에서 선교를 하다가 큰 감동을 받는다. 김흥경 조사(助事, 전도사)와 함께 복음을 전파하고 1901년 죽산 둠벙교회(현 죽산교회)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믿음이 강한 교회 지도자인 영수(領袖, 장로)와 조사 등 22명이 참여한 사경회(査經會)를 열었다. 사경회는 신자들이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공부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우연히 여기에 참석했던 청주의 상인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기독교를 믿게 된 것이다. 이들은 그 길로 고향인 청주 신대리에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자발적으로 마을 주막에 교회를 세운 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신대교회는 민노아가 충북 청주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는 전환점이 됐다. 그는 당시 상황을 "청주 신대리 16명의 학습교인들이 등록됐다. 그들은 교회 건물을 매입하고 거의 매일 밤에 모여 성경을 공부하거나 기독교신문을 읽었다. 비록 지금 청주 근처 서너 곳에서 사역이 이뤄지고 있지만 충청도에서 이 사역이 크게 성장하리라 전망된다."고 기록했다.
마침 북장로회 선교본부도 서울과 영호남을 잇는 중부권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민노아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무렵 민노아는 가정적으로 큰 불행을 겪었다. 1898년 11월 셋째아들이 생후 8개월 만에, 1902년에는 다섯째 자녀가 출생 하루 만에 사망했으며, 안나 여사도 1903년 6월 복막염으로 숨을 거뒀다. 민노아는 정동여학당 교장인 수잔 도티와 재혼한 뒤, 1904년 청주 선교부로 함께 내려와 활동을 시작했다.
주택가에 위치한 청주시 탑동 1호 양관. 소열도(T. S. Soltau) 목사가 1921년부터 18년 간 충북에서 활동하는 동안 여기서 거주했다. 김재근 선임기자
탑동 양관 2호관 부례선목사 기념 성경학교. 부례선(Jason G. Purdy)은 선교와 농촌 봉사활동을 하다가 1926년 장티푸스에 감염돼 29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교인과 미국의 친지, 교우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민노아는 청주에 부임하자마자 선교기지 조성에 착수했다. 수년에 걸쳐 신자들의 헌금과 선교본부, 미국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청주시내 탑동 언덕 일원의 야산을 매입하여, 여러 채의 건물을 지었다. 이들 건물은 선교사 사택이었지만 성경학원 교실, 홍수 때 이재민 피난소로 사용됐고, 1907년에 지은 건물은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소민병원의 진료실과 입원실로 쓰여졌다.
민노아는 1904년 청주읍교회(청주제일교회)를 세우고 충북과 충남 서북부 일원에서 기독교 선교와 교육, 계몽운동을 벌였다.
청주제일교회에는 교회 창립100주년을 기념하는 밀러관(민노아관)이 있다.
청주제일교회의 로간 부인 기념비. 선교와 교육, 구제활동을 벌인 로간부인을 기념하기 위해 1921년에 세운 것으로 청주 최초의 순한글 비석이다. 김재근 선임기자
청주 선교활동을 본격화하여 우선 신대리 주막교회를 새롭게 만들었다. 술을 판매하는 곳을 벗어나기 위해 동네 초가를 매입,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충북 최초의 교회인 신대교회가 태어난 것이다.
1904년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주읍교회(청주제일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선교사들의 열성적인 활동에 힘입어 빠르게 성장했고, 동서남북으로 묵방리교회 화죽교회, 덕천교회, 문의교회, 부강교회, 북문교회 등을 잇따라 개척했다. 청주읍교회가 1938년 개척한 대전 제일교회는 대전중앙교회, 삼성교회, 문화교회, 성남교회, 대흥교회 등 13개 교회를 세워 대전지역 장로교의 모교회 역할을 해냈다.
초기 교회는 여성들에게 한글과 서양문화를 가르치는 등 여성 계몽운동도 전개했다. 맨 뒤가 청주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메리 리 로간 부인이다.
제12회 청주제일교회 하기(여름) 아동성경학교 기념 사진. 1936년 8월 5일 찍었다. 사진=청주제일교회
탑동 양관 앞에서 신도들과 학생, 교사, 선교사 등이 모였다. 1930년대 사진으로 추정된다.
민노아는 충청북도와 충남 서북부를 돌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충북에 세워진 기존의 가덕면 노계교회, 괴산 괴산읍교회, 청천교회 등을 순회하고, 충북의 보은 회인 괴산, 충남 홍성, 경북 상주까지 돌며 복음을 전파했다.
민노아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사경회와 성경공부반을 적극 활용했다. 사경회는 농사일이 뜸한 겨울에 짧게는 3-4일, 길게는 2주간 함께 숙식하며 성경과 신앙을 가르치고 위생과 한글, 과학 등 기초적인 근대적인 교육도 병행했다. 민노아의 부인 수잔 도티는 여성성경공부반을 운영했다.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가정에만 얽매여 있던 여성들은 사경회와 성경공부반에 나와 신앙을 체득하고 한글을 배웠으며, 서구의 근대문물을 접했다.
1914년 장로교 선교부 연례보고서에는 "많은 사람들이 쌀자루, 숟가락, 젓가락, 밥사발 또는 밥을 담기 위한 바가지를 등에 지고 왔다. 그들은 너무 가난하여 하루 10센트의 여인숙에도 못가고 여럿이 함께 방을 빌려 직접 밥을 해먹었다."고 기록했다. 20세기초 농촌의 가난한 교인들이 수십리를 걸어와 한 방에서 숙식하며 성경을 배우던, 숭고하고 성스러운 마음을 짐작케 한다.
수잔 도티를 비롯 안나 도리스, 그레이스 데이비스, 퍼비언스 부인, 쿡 부인, 로간 부인, 릴리언 딘(수잔 도티 사망 이후 민노아와 결혼한 3번째 부인), 올가 존슨 등 여성 선교사의 헌신적인 활동도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김재근, “충청선교의 아버지 민노아 선교사 … 33년간 청주서 복음·교육 헌신”, 대전일보, 2026.6.5일자.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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