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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 분리의 ‘망령亡靈’ (1)

2021.05.24 12:07 | 조회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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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 분리의 ‘망령亡靈’ 

1. 철학을 농락한 주객분리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주객분리라는 망령이 서구 유럽을 시작으로 지금은 전지구적으로 배회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작성한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첫머리를 빌려 주객 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표현해 보았다. 지나치게 과격한 것은 아닌가?


하이데거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그렇지도 않다. “사람들은 주체와 객체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한다. 더욱이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가장 의문스러운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철학이 우롱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Von dem Wesen der Wahrheit『진리의 본질에 대하여』)


우리는 일상에서, 특히 학문에서 무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주객분리를 당연하게 여긴다. 나아가 엄밀한 객관성을 강조하며 주객의 거리두기를 필수적인 것으로서 요청한다. 객관성의 결여는 오류의 원천이 되는 비지성적인 것으로, 때로는 치명적인 실수로 치부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바로 그것에 의해 철학이 농락되어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주객분리는 역사적인 것이다. 또 지역적인 것으로서 출발했다. 즉 역사적 상황의 제약 아래에서 특정 지역, 구체적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후 서양 철학[형이상학]이 서구 문화를 규정하고 또 그러한 서구의 삶과 사유의 문법은 전지구적인 지배를 관철하면서 주객분리는 공고해졌다. 인간이 스스로를 주체로 놓고 존재하는 것들은 그 앞에 마주한 객관이나 대상으로 내세우는 주객이분법은 거의 자연의 이법만큼이나 당연한 것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존재 사건에서 주요한 책임이 있는 대표적 사람으로 철학자 데카르트가 꼽힌다. 그는 물체와 정신을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두 실체로 대립시켰다. 그럼으로써 주체와 객체, 세계와 인간 사이에 건너기 힘든 균열을 가로질러 놓았다. 이제 그 분열을 메워야 하는 일은 데카르트 이후의 서구 철학이 짊어져야 하는 과제가 된다.


이러한 노력은 데카르트가 남겨 준 주객분열의 유산 위에서 주체의 의해 객체의 타자성他者性 혹은 이종성異種性을 지양, 제거하여 주체로 동질화시키려는 시도로서 나타난다. 즉 대립의 한 항인 인간의 편에서 분리를 봉합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근대 형이상학의 흐름에서 존재자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지각된 것’, ‘구성된 것’, ‘정신의 자기 전개에 의해 타자성이 지양되고 정신의 것으로서 긍정된 것’, ‘의지에의 의지에 의해 무제약적으로 처분가능한 것’ 등으로 규정된다.


이와 같이 현실적인 것 안에서 의지나 이성 등 인간적인 것을 확인하는 방식의 ‘화해’는 존재자들을 그 자체로 있도록 놔두지 않고 우리에게 있어서의 어떤 것으로서 드러나도록 하는 주체 중심의 대상화로서 진행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주관주의’는 현대 기술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에 이른다. 현대 기술과 과학의 본질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관점과 관심에 따라 무제약적으로 장악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데 있다. 기술과 과학에서 지배적인 접근 양식에 따라 존재하는 것들은 고장나며 갈아끼우고 방해가 되면 치우고 쓸모없으면 폐기하는 부품이 된다.


모든 것들이 주문注文(die Bestellung)의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당장 ‘인적 자원’이란 말을 떠올려보라.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 새롭게 나타난 변화가 아니라 주객이 분리되면서부터 이미 예정된 결과이다.


이러한 주체 중심적 사유는 모든 것을 [속성을 담지하는] 실체(주체)와 [실체에 포함된] 속성의 관계, 말하자면 주어와 술어의 관계 속에 파악한다. 그러나 주객이나 주술主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과연 리얼리티를 남김없이, 또 왜곡 없이 담아낼 수 있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다.


번개에 대한 니체의 얘기는 이러한 사정을 함축한다. 그는 우리가 번개를 ‘번개가 번쩍인다.’로 받아들이는데, 사실은 번개와 번쩍임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그 하나의 동일한 것을 주어, 술어의 관계 혹은 실체와 속성의 도식으로 나누어 번개는 번쩍임의 주체로, 번쩍임은 그 주체의 속성으로 이해한다. 사물 그 자체를 순전히 만나려 하지 않고 주객 관점을 대상에 씌워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객의 ‘안경’을 거쳐 ‘인간적으로’, ‘이차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사물은 말이 없고 인간은 자기가 구성한, 말하자면 자신의 ‘때’가 이미 묻은 대상을 현실로 간주한다. 사실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후천적이었던 ‘안경’은 벗을 수 없는 선천적인 것으로서 오해된다. 그것이 서구 형이상학이 우리를 이끌어온 방식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으로 각인된 표상의 방식은 도처에서 단지 형이상학적으로 건립된 세계만을 볼 뿐이다.(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그 세계는 끝내 하나의 상像[세계상]이지 물物 자체가 아니다.

“대상과 자립적인 것의 대상성으로부터는 사물의 사물성에로 어떤 길도 나 있지 않다.


(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주객 분리의 존재론 아래에서 그 자체로 있지 못한 것은 사물만이 아니다. 인간 또한 인식의 주체란 상자에 갇힘으로써 그들의 고유함과 참됨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사물과 인간 모두 자기 본질로부터 소외돼 있다. 이러한 비본래성이 역사적, 역운적歷運的인 것이라면 이것의 극복은 당연히 역사 이전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있을 것이다.


주객 이전의 시원으로 들어섬이 없이 주객으로 쪼개져 흩어진 잔해를 가지고, 그것도 주체 중심으로 결합시키려는 노력은 이미 드러나듯이 무용無用한 정열로 그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그 때의 사유와 경험을 눈짓하는 흔적을 통한 회상回想 속에서 새롭게 불러올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는 낱말이 시원을 소환하게 하는 자취이며 부호이다. 그래서 시원에 대한 회상은 낱말의 의미 영역과 어원을 추구하는 것으로써 이뤄진다. 언어는 시원의 삶과 세계이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窓이다. 회상은 단순히 과거에 매이는 것이 아니다. 회상 속에 시원의 잊힌 것이 새롭게 우리 앞으로 도래到來한다. 회상은 기재旣在의 과거와 도래의 미래가 현재에서 통일된 시간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의 숙고는 서구 존재 사유 자체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와의 대화를 위해서도 요구되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금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든 숙고는 희랍 사상가들과 그들의 언어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들의 역사적 현존 기반에 뿌리를 내릴 때 열리고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화는 거의 준비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 대화는 동아시아 세계와의 불가피한 대화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41쪽)


하이데거는 먼저 그 대화의 길을 내고 있다. 하이데거의 손짓을 따라 그 길을 따라가 보자. 우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Wissenschaft und Besinnung(학문과 숙고)」란 짧은 글에서 그가 내고 있는 사유의 고랑이다.


우리는 눈앞에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현실적인 것들’이라고 부른다. ‘현실적인’은 독일어로 ‘wirklich’라고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실적인 것은 ‘작용하는’(wirkend) 것의 영역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후자의 동사 ‘작용하다’(wirken)는 ‘하다’(tun)를 말한다. 그리고 ‘하다’는 다시 그리스어 ‘테시스’(θὲσις)로, 더 멀리는 인도 게르만어 ‘데’(dhē)로 소급된다. 테시스는 ‘정하여 세움[定立]’, ‘앞에 둠’을 뜻한다.


이런 유래에 주목할 때 ‘tun’은 행동, 활동이란 의미에서의 인간적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tun’은 보다 근원적으로는 어떤 것이 스스로부터 그 자체를 앞에, 가까이 내세우도록 함, 즉 현존에 이르게 함의 ‘테시스’이다. ‘학위 논문’이나 ‘논지’를 의미하는 영어 ‘thesis’에 무엇을 내세움, 정립함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현실적인 것’은 ‘작용하는 것’이며 그것은 본래 ‘현존하도록 앞에 내세우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현실적인 것’의 존재인 ‘현실적으로 있음[현실성]’(die Wirklichkeit)이란 곧 ‘현존에 내세워져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존재 이해는 ‘작용하다’(wirken)란 말 자체가 지닌 의미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wirken’의 명사형인 ‘Werk’(활동, 행위, 작품)의 어원은 그리스어 ‘에르곤’(ἔργον)과 함께 인도 게르만어 ‘우에르그’(uerg)에 두고 있다.


이러한 시원적 의미는 ‘wirken’과 ‘Werk’의 근본 특징이 원인과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비은폐非隱蔽로 이르게 함’에 있음을 알려준다. 비은폐는 스스로 어떤 것이 어둠과 감춤으로부터 스스로 그 자체를 밝게 드러냄 혹은 현존에 이름[자현自現; 발현發現]을 말한다. 즉 에르곤으로 정립된 것은 스스로 완전한 현존에 내세워진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의미에서 본래적으로 현존하는 것의 현존을 ‘에너르게이아’ 또는 ‘엔텔레키아’란 말로 불렀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에르곤과 에너르게이아를 각기 완전히 다른 의미 영역을 지닌 ‘actio’(작동, 행위)와 ‘actus’(운동, 활동)으로 번역하고 사유했다. 이를 통해 앞에 내세워짐, 앞에 이르게 됨은 ‘하나의 작용에 의해 비롯됨’이란 의미로 바뀐다.


이와 함께 현실적인 것은 ‘결과로서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결과란 언제나 선행하는 사태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현실적인 것들은 인과성의 조명 속에 탈은폐脫隱蔽된다. 사물은 그것 자체로 있지 않고 인간이 투사한 인과적 질서에 따라 자신을 짜맞추어야 한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고자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와 같이 현실적인 것이 작용에 따른 결과로서 나타난 데는 또 다른 변화가 결속돼 있다. 행위나 작용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은 확실하다고 보증되는, 즉 ‘사실적, 실제적인 것’(das Tatsächliche)으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사실적’이란 말은 곧 ‘확실한’(gewiß; sicher)과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이래 근대의 시작과 함께 ‘현실적인’이란 말은 다시 ‘확실한’(gewiß; sicher)의 뜻을 갖게 된다. 이에 상응하여 작용의 결과로서 정립되지 않은 것은 사실적이지 않은, 불확실한 것이고, 그래서 비현실적인 것이다, 즉 허구나 가상과 같은 것으로서 참이 아니다.


그런데 확실성이란 언제나 바라보는 주체에 있어서의 확실함이다. 사물 자체의 성격이기보다는 누군가에게 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것은 행위나 작업에 따른 결과이고 그러는 한 확실히 보증된 상태에 이르게 되는 사건에는 이미 대상을 향한 주체의 표상함 혹은 표상하는 주체의 개입이 동반되고 있다.


표상함이란 대상을 뒤쫓아가 그것을 맞은편에 붙잡아 놓는 것으로서 사물에 접근하는 특정한 행위이다. 이에 따라 현실적인 것은 이제 표상의 대상으로서 자기를 내보여야 한다. ‘대상’을 뜻하는 독일어 ‘Gegenstand’의 뜻 자체가 맞은편에 있음, 마주함의 의미를 갖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Gegenstand’는 18세기에 비로소 라틴어 'obiectum'의 번역으로서 나타났다. ‘대상, 객관’은 이렇듯 역사적인 개념이다. 이는 그 이전의 중세에서, 그리고 더더욱 희랍에서는 현실적인 사물이 대상으로서 표상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중세까지만 해도 주객분리가 확고한 지반 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근대에 이르러 현존하는 것의 존재[현존]는 더 이상 비은폐나 현존으로 내세워져 있음이 아니라 대상으로 있음[대상성]으로 바뀐다. 주체 맞은편에 서 있다는 대상성이 현존하는 것의 1차적인 성격인 것이다. 쉽게 말해 ‘존재자가 현실적으로 있다’는 말은 ‘나에 있어, 나를 향해 대상으로서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대상성에 대한 물음, 즉 확실시하는 표상함의 맞은편에 세워져 있음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과연 대상으로서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인식 가능성의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그것의 인식 가능성에 의해 결정된다. 인식론적 물음이 존재론적 물음을 대치하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 철학의 시작과 전개를 규정한다.

근대에서 인식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본래 “인식 과정에 대한 신체적-정신적 메커니즘에 대한 물음으로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인식 안에서 인식에 대해 대상의 현존 가능성을 묻는 물음이다.”


(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이와 같이 근대 철학에서 존재자의 존재자성, 즉 ‘존재자가 존재한다’ 혹은 ‘존재자로서 있다’는 성격은 지각과 사유의 대상성이 된다. 앎과 인식이 전면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와 맞물려 진리는 존재자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확실성으로 떨어진다.


“인식론과 그렇게 간주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자를 자신에 있어 대상으로서) 확보하는 표상함에 속하는 확실성으로서의 진리에 기초한 형이상학과 존재론이다. … (근대 인식론은) 대상의 형이상학, 즉 주체에 대한 객관, 대상인 존재자의 형이상학이다.


(Vorträge und Aufsätze『강연과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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