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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인간, 철학자들의 웃픈 삶 - 쿠사누스(2)

2022.04.19 16:46 | 조회 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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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 쿠사누스(2)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1️⃣처음으로 우주의 무한을 떠올린 철학자

-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Nicolaus von Kues[쿠사누스]


2. 독일 대학 최초의 제적생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가 실재론과 유명론간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아직 몇 년 후의 일이다. 우선은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에게 공격의 초점을 맞춘다. 그는 교수들에게 전혀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주지 못했다는 점을 냉정하게 지적하면서, 그들이 가르쳐 준 정도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다고 얘기한다. 게다가 그는 고작 그 정도를 배우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더 이상 강의를 들을 이유가 없다고 덧붙인다.


그의 이런 비난은 거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얘기만은 아니다. 실제로 보면 당시 보편자 논쟁은 전혀 진척을 보지 못한 채 제 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답보 상태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교회에게 있다. 수백 년 전부터 교회는 개별자들에 관한 학설이 확산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입장이며, 때에 따라선 아예 논의 자체를 금지시키기조차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편자 논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만한 사상가를 확보하지 못한 대학에게도 응분의 책임은 있다. 그러나 교활한 교수들은 니콜라우스의 오만한 질책에 대해서 당장은 대응을 삼가한다. 대신 한 학기가 끝난 후 교수들은 그에게 퇴학 조치를 내린다. 니콜라우스는, 대학에서 제적된 최초의 독일 대학생이란 명성과 함께, 태연히 짐을 꾸려 상부 이탈리아로 향한다. 그곳 파두아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할 생각이다.


그는 철학공부라면 이제껏 배운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이번엔 신중한 고민 끝에 선택한 파두아 대학은 유럽 정신세계의 중심지로 꼽히는 대학이다.




특히 니콜라우스가 등록한 신학부는, 바티칸을 출입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매우 뛰어난 교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학부이다. 시골 청년 니콜라우스는 별로 위축되는 법이 없이 이 저명한 교수들에게 접근한다. 흔히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을 대면하게 될 때 갖기 쉬운 두려움 같은 것이라고는 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저명한 법률가 케사리니와 카프리카나의 총애를 받는다. 이 두 사람은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추기경의 지위에 올라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또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며, 훗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신대륙 발견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기기도 한 파올로 델 포조 토스카넬리가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토스카넬리는 자기가 총애하는 독일인 친구를 신비한 기하학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토스카넬리의 지도


6년 후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니콜라우스는 고향으로 돌아 와 변호사업을 개업한다. 하지만 그는 첫 번째 소송-유산분쟁에 관한 소송-에서 패소하는 불운을 당한다. 여기에 화가 난 그는 변호사 일을 포기하고, 쾰른으로 떠나 그곳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신앙심 깊은 건축가들이 1백80년에 걸쳐 쌓아 올린 쾰른 대성당은 종교 생활의 중심지이다. 이곳에서 위대한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ehart는 자신의 학설 중 일부를 철회해야 했다. 그는 “내가 있고 나서는 신은 더 이상 나 없이는 있을 수 없다.”란 심각한 의미를 가진 역설로써 쾰른의 대주교를 조롱한 바 있다. 이 신비주의자의 저술들은 그후 정확히 1백 년 후 대성당의 도시 쾰른에서 공부하던 니콜라우스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


이에 비해 대학에서는, 이곳 쾰른에서 삶의 일부를 보냈고, 그 때문에 ‘쾰른 사람’이라고 불리던, 전설적인 스콜라 학자 알베르트 마그누스(1193~1280)의 사상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알베르트의 학설을 공부하면서 니콜라우스는 훗날 자기의 철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한 개념과 만나게 된다. ‘대립의 일치’란 개념이다.


하지만 니콜라우스는 이보다 먼저 부업 활동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 니콜라우스는 노랗게 변색한 옛 문헌들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문헌들을 계속 발굴해 내 이들이 위조돼 있음을 밝혀 낸다.


이때 그는 한 가지 충격적인 일을 감행하는데,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가 8세기 무렵에 위조된 것이라고 세상에 폭로하는 것이다. 이 문서는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280~337)의 명의로 교황 실베스터 1세에게 보내졌던 것으로, 이 문서를  받은 실베스터 1세는  돌연 앓고 있던 나병에서 깨끗하게 낫게 됐다고(전설은 “기적”을 통해서라고 한다) 한다.


그후 이 문서는 교황에게 서구에 대한 세속적 지배권(교황수위권敎皇 首位權, Primat)을 보장해 주었고, 황제는 단지 2인자의 역할만을 하게 됐다. 니콜라우스가 위조 사실을 입증하면서 그 ‘귀중한 문서’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니콜라우스는 이같은 감정의 능력을 통해서 평생 동안 크고 작은 군주들을 괴롭힌다. 거의 모든 군주들이 자기 권력의 정당성 기반을 모종의 문서들(세례 기록들, 유언장들)에 두고 있는데, 그들 자신들도 이 문서들이 진짜인지, 과연 니콜라우스의 원전 감정에서 진짜로 판명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니콜라우스의 쾰른 체류 기간이 얼마나 되는 지는 그의 연대기를 통해서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황상 1422~1430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동안 벨기에의 루벵 대학이 그를 법학 교수로 초빙하려 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편 그는 수도원의 은둔 속에 삶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아직도 그는 자기에게 숨어 있는 철학적 재능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도무지 그는 철학을 장래의 자신의 직업으로 고려해보지 않는 것이다. 1430년 그는 신부 서품을 받는다. 그때 나이 29세. 그는 성직자로 성공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그의 성공은 이미 5년 전에 시작됐다. 그 당시 그에겐 현대의 처세술 교본들이라면 한결같이 언급하고 있는 처세의 기본원칙들이 확고하게 서 있었다. ‘남보다 빨리 출세하려면 이미 출세한 사람의 눈에 들어야 한다.’ 니콜라우스는 이 원칙을 충실하게 지켜, 대학생의 신분임에도 트리어Trier의 대주교인 오토 폰 찌겐하인의 비서로 활동한다.


비서로 일하면서 그는 또, 출세를 마음먹은 사람들이라면 의당 염두에 둬야 할 또 다른 조건들을 채운다. 니콜라우스는 주교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문제들 중 어떤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가를 찾으려 하지 않는 대신 주교의 마음 속 근심 중 어떤 것이 그를 가장 주교를 괴롭히고 있는 가를 짚어낸다. 당시 오토 대주교의 마음을 늘상 짓누르던 문제란 교구敎區 내 수도원의 방종한 생활태도이다. 니콜라우스는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멋진 개선책을 강구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와 주교는 친밀한 사이로 발전한다. 이것은 니콜라우스에겐 황금만큼이나 귀중한 기회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주교들이 그렇듯이 트리어의 대주교 역시, 의례 교구의 전全토지와 마을로 이뤄져 있기 마련인 상당한 규모의 재산(‘성직록聖職祿, Pfründe’)을 소유하고 있다. 교구의 주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성직자들의 유복한 생활이 보장되는 반면 주민들은 그 대가로 사제들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성직자들이 사제보다는 착취자로서 자신들의 성직록을 관리한다. 가능하면 더 빨리 재산을 쌓기 위해 농부와 수공업자들에게서 생업을 빼앗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그들은 벌금을 부과하기도 하고, 또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값비싼 면죄부를 팔기도 한다.


니콜라우스는 착취하고 재산을 증식하는 것에 관해, 문서감정 만큼이나 능란한 기술을 익힌다. 그가 신부, 곧 사제가 되기도 전에 친구이기도 한 오토 대주교는 자기 성직록 중 이익을 많이 내는 일부 재산을 그에게 넘겨준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상당한 규모의 재산가로 발전한다. 자신이 엄청난 재산을 벌어들이는 동안 사제 업무를 대신 맡아 해 줄 몇 명의 보좌 신부들을 수하에 두기도 한다. 그 무렵 그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 책략과 냉혹함이란 현대의 오나시스나 게티 같은 거부巨富들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다.


니콜라우스는 자기의 재산 축적 과정이 과연 신의 의지에 합당한 것인지 스스로 물음을 던져본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가 내린 대답은 너무나 비철학적이고 유치한 것이었다. 한창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중인 재산가들이라 할지라도 그런 식의 대답에 대해선 민망스러워 할 정도이다. 니콜라우스는 그 동안 자기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푼 자선들과 많은 재산을 갖고 있음에도 잃지 않고 있는 검소한 생활을 떠올리는 것으로써 그 대답을 대신한다.


이같은 그의 탐욕스러움이 소크라테스나 칸트같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이미지를 가진 위인들의 반열에 그를 포함시키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교회 역시 자신들의 저명한 아들이 갖고 있는, 이같은 반감을 살만한 성격에 대해선 마찬가지로 난감한 입장을 보인다. 어쨌든 교회는 니콜라우스를 성인聖人 명부에 올리지 않는다. 만약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면, 교회가 그렇게 점잔을 빼지는 않았을 터이다.




1430년 니콜라우스의 후견인인 트리어의 오토 대주교가 사망한다. 후임 대주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싸움이 급기야는 추악한 전쟁으로 비화된다. 주교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 중 가장 성격이 포악한 그라프 울리히 폰 만테르 사이드가 바젤Basel 공회의에 청원을 한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주교 자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공회의의 재판을 통해 확인 받고 싶어 한 것이다. 변호사이자 교회법 박사인 니콜라우스가 그를 수행한다.


이렇게 해서, 그 보다는 우연하게도 쿠에스 출신의 어부漁夫 아들은 거대한 정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교회의 주도적 인물들이 모여서 서구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적 무대가 바젤이란 곳이기 때문이다. 바젤에 오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긴 니콜라우스는 외교가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낮은 신분이 앞으로는 더 이상 떠올려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크레브스Krebs란 성을 버리고 대신 고향 지명의 라틴어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니콜라우스 쿠사누스Cusanus란 이름으로 역사를 만드는 무대에 들어선다. 그의 화려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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