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살고 있지 않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4)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4️⃣ 세상이 나를 찾을 것이다.
1831년 베를린에서 콜레라가 발발했을 때(헤겔은 이 전염병의 희생자가 된다), 쇼펜하우어는 한 죽은 친구가 그를 어느 낯선 지방으로 데리고 가려는 꿈을 꾼다. 이를 하나의 경고로 해석한 그는 프랑크푸르트로 몸을 피한다. 그때부터 평생 동안을 쭉 그곳에서 살게 된다.
그 사이 공주는 그의 곁을 떠났다. 이제 쇼펜하우어는 콜레라로부터 안전한 도시에서 혼자 산다. 그가 “꼬마(Butz)”니 “아트만(Atman, 세계영혼)”이니 하고 부르는 한 마리 푸들만이 고독한 연금생활자의 삶을 함께 보낸다.
그때부터 단조로운 삶이 시작된다. 쇼펜하우어는 대부분 외국어로 된 많은 책들을 읽고, 개와 함께 마인강변을 산책하고, 여관에서 점심을 먹는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타임스’(The Times) 지를 보면서 새로운 소식들을 접한다. 1848년 그는 이 신문에서 유럽의 절반을 뒤흔든 혁명적 소란에 대한 보도를 지켜본다.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동요가 시작되자, 그는 불안에 감싸인다. “전 소유권이, 실로 모든 합법적 상태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봉기의 진압과정에서 다쳐 불구가 된 군인들을 자신의 유언장에 일반상속인으로 지정해둔다.
이미 베를린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고향에서도 다수의 철학 논문들을 작성한다. 이 중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Uber die Freiheit des menschlichen Willens)」란 논문이 노르웨이 학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그는 무엇보다도 오늘날까지도 명성을 더해주고 있는 작품을 저술한다. 그 안에 「생활의 지혜를 위한 잠언箴言(Aphorismen zur Lebensweisheit)」이 실려 있는 『여록과 보유補遺(Parerga und Paralipomena)』란 책이다.
다양한 것들에 대한 개별적이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된 쇼펜하우어의 생각들은 엄밀하게 보면 세계를 저주하는 자신의 철학과는 모순을 이룬다. 왜냐하면 그가 책 속에서 제시한 의견들은 “행복한 생활을 위한 지침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행가들에게 그들의 느낌을 연구해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문명의 가장 낮은 단계를 가리키는 유목생활은 이제는 일반화된 여행문화에서는 최고급의 여행방식이 되었다. 전자가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면 후자는 권태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또 모욕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이런 말을 남긴다.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 모욕을 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에 대해 턱없이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서 감탄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충고한다.
“우리는 칭찬을 받을 때 가장 큰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남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럴 만한 모든 이유가 있을 때조차도,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마지못해 그렇게 한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에게 솔직하면서 자신을 칭찬할 수 있게 된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를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된다.”
쇼펜하우어는 말년에 더 이상 자화자찬에 의존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영국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곳의 한 신문이 그에 관해 기사를 싣는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세계에서 가장 천재적이며 가장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저술가중 한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우리는 다만 현재의 독일 철학자중 깊이와 창조적 능력에서 …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기사는 1854년 시인과 사상가의 나라[독일]에도 소개되고, -마침내!-쇼펜하우어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면서 최초의 숭배자들이 나타난다. 쇼펜하우어를 “순수한 불가해성不可解性”이라고 찬미한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 중 한 사람이다.
3년 후 쇼펜하우어는 그의 작품들이 철학 전문가들에 의해서도 주목을 끌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본 대학이 처음으로 강의목록에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집어넣고, 곧 이어 다른 대학들이 같은 결정을 한다.
그는 1860년 9월 21일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어디에 묻히기를 원하느냐란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소. 당신들이 나를 찾게 될 것이오.”
사람들이 그를 찾았다. 물론 그 후 이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인간의 도덕적 학습능력에 대한 회의가 커가는 만큼 말이다. 경쟁자이던 헤겔과는 대조적으로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선을 향해 진보한다는 것을 반박했다. 그리고 세계전쟁과 원자폭탄 또는 기아와 난민, 환경 등의 재앙을 겪고 있는 20세기는 계속해서 그러한 가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비관적 세계해석에 대해선 논리적인 이론異論들이 제기된다. 일례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설명한다.
“낙관론은 세계가 우리의 만족을 위해, 비관론은 세계가 우리의 불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또 그렇다는 것을 입증하려 애쓴다. 학문적으로 보면 전자의 의미에서든 후자의 의미에서든 ‘우리가 관건이다’란 사실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입증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지구는 우리에게 태양이 비칠 수 있도록 회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낙관론자냐 혹은 비관론자냐 하는 것은 성향의 문제이지 이성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혐오하는 성향의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모든 세계 중 가장 나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보면 두 입장은 똑같이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의미심장함은 사상가 중 처음으로 의지(또는 충동)를 인식보다 우위에 두었고 또 구체적인 삶 속에 살고 있는 적나라한 인간을 철학 해석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이를 통해 그는 무엇보다도 심리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를 읽는 사람은 인간 행동에 대한 비판적 이해력을 높일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실존철학의 선구자로 간주되지만 그의 삶이 보여준 실존적 비구속성은 그를 다른 실존철학의 거장들, 야스퍼스, 하이데거, 카뮈, 사르트르로부터 구별되게 만든다. 물론 이들 사상가들은 모두 그를 탐구하지만, 대체로 매우 비우호적인 표현을 써가며 비판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그 또한 인간 실존에 관한 획기적인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이던 사상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는 그야말로 처음에는 존경스런 롤 모델로서, 나중에는 비판에 놓인 대척자對蹠者로서 길을 밝혀주는 사상가였다. 무엇보다도 니체를 거치며 지난 세기에 미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실로 크다. 그러나 아주 적은 부분만이 연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