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중부 구마모토현에 있는 다마나시(玉名市), 이곳에는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이 있는데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조영된 전방후원분 형태의 고분입니다. (글 박덕규)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고분시대(4~6세기 경)에 성행했던 무덤 양식으로 '일본열도에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일본의 고분 형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은 고분을 발굴하지 않고 보존만 하는데요(대일항쟁기에 우리나라 고분은 마음대로 파헤침) 그런데, 1873년 태풍으로 고분 일부가 유실되면서 내부가 공개되어 발굴이 진행되었습니다. 14개의 큰 칼을 비롯해 청동거울 등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요. 그중에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을 당시에는 왜(倭)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1986년, 전북 익산 입점리에서 고등학생이 산에서 칡을 캐다가 구덩이를 발견했는데요 뭔가에 홀린듯이 들어가보니 진귀한 보물, 아니 유물이 묻혀 있었습습니다. 총 48점을 찾아내어 집으로 가져왔는데요. 1,500년 만에 익산 입점리 1호 고분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유물중에서 주목을 끌었던 것은 에다후나야마 고분과 매우 흡사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무령왕릉보다 앞선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 <익산고분, 에다후나야마 고분 문화의 원류>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인 보도를 하게됩니다.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도 금동관 2점이 발굴(2003년)됨에 따라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을 제작한 곳은 왜(倭)가 아니라 백제로 보는 경향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수도가 아닌 지방에서 발견되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에 대해서 학계는 '백제 왕실이 지방 유력자들을 통해 간접지배를 하는 과정에서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여한 것'으로 보는데요. 그렇다면, 큐슈에서 나온 백제의 금동관모와 신발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소진철은 에다후나야마 고분의 금동관모와 신발이 백제의 봉국이었던 담로의 지배자에게 보내준 사여품이라 했고, 김석형은 백제의 분국이 있던 북큐슈의 후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봤습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전형적인 왜의 고분이라 일컬어지는 전방후원분에 묻혀있는 피장자가 백제인이거나 백제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점입니다.
백제의 관모장식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백제의 관모에 대해 알아볼텐데요.
『구당서』에는 백제의 복식이 설명되어 있는데, 백제 왕은 오라관(烏羅冠)이라 불리는 관모에 금꽃을 장식하고, 관료들은 은꽃으로 장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금꽃 장식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구당서』의 기록과 같은 금제 꽃장식 한 쌍이 나왔습니다.
▶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식 (왕)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백제왕의 복식을 재연했는데 사진처럼 오라관-검은 비단으로 된 관모(상투 위에 쓰는 것)를 머리에 쓰고 관모 양쪽에는 금꽃 장식을 달았습니다.
▶ 드라마 <근초고왕>에서 재현된 백제왕의 오라관(烏羅冠)
관료들의 은꽃 장식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꽃이 피기 전에 맺혀있는 꽃봉오리 모양입니다. 왜 그럴까요?
왕의 관모에 활짝 핀 금꽃은 '수행의 완성, 도통, 신성, 조화, 통치권' 등을 상징하고, 관료들의 머리에 은꽃 봉오리는 아직 피지 않은 꽃, 미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왕의 금꽃은 어떤 의미일까
금꽃, 금화金花는 금화金華로도 쓸 수 있습니다. 화華는 빛나다, 꽃의 뜻을 갖고 있는데요.
'황금꽃의 비밀'이라고 당나라 8신선 중에 하나였던 여동빈 신선은 '황금꽃=빛=태을'이라고 했습니다.
"황금꽃은 곧 빛이다. 빛은 어떤 색깔인가? 황금꽃에서 형상을 취하였다. 또한 꽃 안에 빛이라는 한 글자가 숨어 있다. 선천 태을의 참된 기운이다.(金華卽光也, 光是何色? 取象於金華, 亦秘一光字在內, 先天太乙眞炁)" (『태을금화종지‧天心』』)
금꽃은 빛이고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 태을(太乙)이라는 뜻입니다.
▶ 당나라 신선 여동빈의 『太乙金華宗旨』를 번역한 The secret of the Golden Flower
태을하면 떠오르는 게 있을까요?
지난 글에서 야쓰시로시의 '묘견궁'과 '영부신사'에서 모신 북극성, 태일신이 바로 태을입니다.
https://www.jsd.or.kr/?c=culture/culture1/992&uid=26808
가야에서 큐슈로 건너간 공주의 묘견신앙과 백제 왕의 금꽃이 하나의 뜻으로 만나는 것이 신기합니다.
꽃으로 장식한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꽃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꽃으로 만든 장식들로 꽉 차 있는데요.
바닥의 흙에서 발견된 약 840여개의 꽃장식과 왕과 왕비의 목침에 새겨진 꽃 그림, 벽을 가득 채운 꽃문양 벽돌 등이 있습니다.
백제 예술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꽃 장식이 있는데요. 바로 '운모'라는 돌로 만든 꽃입니다.
백제 27대 위덕왕(525~598)은 죽은 왕자를 위해서 부여 왕흥사지 목탑의 심초석에 사리구(舍利具)를 봉안했는데, 주변에서 운모 꽃이 발견되었습니다. 흰색이 도는 백운모(白雲母)에 금박을 씌워서 금화(金華)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운모 장식이 얼마나 얇은 지는 이를 얼굴 가까이 대고 관찰하던 사람의 입김에도 날아가 흩어진 일이 있었다는 증언에서도 뒷받침된다.이를 관찰한 대전대 이한상 교수는 "백제인들이 어떻게 운모판을 이렇게 얇고 정밀하게 가공했는지 놀랍기만 하다"면서 "난생 처음 접하는 유물이라 이에 대한 향후 심도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일보 2007년 11월 20일 기사)
운모 꽃 옆에서 철로 만든 삼각형의 테가 나왔는데 이를 토대로 복원하니 아래 사진처럼 나타났습니다.
▶ 복원모형, 국립부여박물관
역삼각형의 관모에 꽃을 달아 이마에 꽃이 핀 것처럼 했던 것입니다. 마치 "나는 한 송이 꽃이다. 빛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에 꽃을 꽂았던 백제인들
흥미로운 점이 또 있는데요. 금동관모와 군인들이 쓰던 투구에도 꽃 장식이 있는 것입니다.
금동관모 가느다란 관이 붙어 있고 그 끝에는 사발 모양의 반원 장식물이 달려있는데요. 이것은 꽃줄기와 꽃봉오리를 상징합니다.
투구에도 흡사하게 닮은 장식이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머리에 꽃을 꽂은 모습입니다.
▶ 좌) 공주 수촌리 금동관모 우) 백제 투구
꽃을 머리에 꽂고 다닌 신라의 화랑
신라 화랑들도 머리에 꽃을 꽂아서 화랑花郞이라 불렸는데요. 이러한 전통은 단군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국자랑이 밖에 돌아다닐 때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이라 칭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라 진흥왕(540~576)은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한다"면서 화랑도 창설을 명령했는데, 화랑도는 풍월도를 수련하는 무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풍월도에 대해서 최치원은 풍류(風流)라고 했습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풍류(風流)라고 이른다. 교화를 행하는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갖추어 있는데, 실로 이에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년))
풍류는 나라의 기풍, 국가의 道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道의 실체는 화랑을 이끄는 지도자를 국선國仙이라 부른데서 알 수 있습니다. 국선은 '나라의 신선'이란 뜻이니, 한마디로 화랑도는 '신선의 도를 수련하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신라에는 예로부터 신선의 도가 전해져 내려왔는데 진흥왕이 젊은 인재들을 모아 수련하게 해서 국가의 인재로 양성했던 집단이 화랑이며, 화랑은 신선 수행의 완성을 뜻하는 꽃을 머리에 꽂고 다녔던 것입니다.
신라에 화랑이 있다면, 고구려에는 조의선인, 백제에는 무절이 있었습니다.
백제 왕을 비롯한 관료들이 꽃을 머리에 꽃았다는 것은 백제에도 예로부터 전해져 온 신선도가 있었고, 수행의 완성, 신선이 되는 상징으로 꽃을 꽂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왕대로 가면 불교와 습합되면서 부처, 해탈, 완성을 상징하는 연꽃으로 바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