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주영 <객주> 초고, 세상 다 줘도 못 바꿔
집에 있는 날은 한 달에 열흘도 채 안 됐다. 극단적으로 작은 글씨는 짐을 줄이기 위한 묘수였다. 소설가 고(故) 이문구는 김주영의 노트를 보고 “이것은 그의 피다. 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이라고 평했다. 작가의 치열함, 치밀함의 정수 그 자체라는 것이다. 연재가 끝난 해에 창작과비평사에서 ‘객주’를 9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이후 2013년 마지막 10권을 내면서 연재를 시작한 지 34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2014년 객주문학관이 개관한 이래 김주영은 고향 청송에 내려와 지낸다. 대부분 시간은 문학관 내 집필실 ‘여송헌’과 진보면 모처의 작업실에서 보낸다. 그는 “고향을 떠올리면 아픈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물로 배를 채우는 날이 허다했고, 소풍 날에는 도시락통에 삶은 감자 한 알을 넣어갈 정도로 가난했다. 이날 점심, 인근 식당에서 기자와 갈치조림을 먹으면서도 그는 감자를 골라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못 먹습니다.” 하지만 장이 열리던 날을 떠올리면서는 눈을 반짝였다. “내 앞에 펼쳐진 진풍경에 매혹돼 장날마다 학교를 빠졌습니다. 그게 결국 ‘객주’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우리말 갈래 노트와 저울추
“이 문학관에 오는 관람객들이 ‘옛날 거 많이 모아놨구나’ 이야기를 해요. 그럴 때 저도 ‘아, 내가 옛날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지요.” 김주영은 이날 문학관에서 또 다른 ‘보물’을 공개했다. 소설 ‘객주’를 쓸 당시 참고하기 위해 그가 직접 정리한 ‘우리말 갈래 노트’들이다. ‘객주’는 그 시대의 말을 제대로 살린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작가 자신도 집필 당시 필요한 단어를 꼼꼼히 정리해 자기만의 우리말 갈래 사전을 만든 것이다.
말[馬]과 관련된 단어만 정리한 노트 한쪽만 봐도 생소한 말이 가득하다. “구마(마구간에 있는 말), 기재마(타기도 하고 짐도 싣는 말), 관전마태(고을에서 관마와 군마를 사육하는 사료로 쓰는 콩), 먹총이(검은 털과 흰 털이 섞여 난 말), 이도수아(청록 또는 홍록으로 땋은 두 가닥의 끈을 말 굴레의 장식으로 드리우는 것)….”
그는 과거 한 출판사로부터 ‘옛말이 너무 어려우니 쉬운 말로 고쳐서 다시 내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끝내 거절했다. “호텔에 가서 쓰든, 외국에 가든 경비를 다 대줄 테니 쉬운 말로 고쳐서 내면 아주 많이 팔릴 거라고…. 한동안 나도 그 유혹에 빠졌는데, 그 단어를 찾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나. 여기에 딱 맞는 말을 찾기 위해 숱한 밤을 새우지 않았나. 못 바꾸겠더라고.”
전국 각지를 떠돌며 모은 재래식 저울추 50여 점도 그의 애장품이다. “상인들한테 돈 주고 사기도 하고, 골동품점에서 사기도 했다”며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흥미로운 물건입니다. 물건의 가치가 저울에 의해서 결정되거든요. 저울이 생기면서 규격화가 된 거지요.” 조선 후기 보부상 집단의 출현과 그 상업 활동을 소설로 담아낸 ‘객주’를 써낸 작가에게 보부상들이 써왔던 저울추는 ‘초기 자본주의의 씨앗’과도 같은 매혹적인 물건이라고 했다.
<참고문헌>
1. 황지윤, "노트 20권에 3mm 글씨로 까맣게 채운 소설<객주> 초고, 세상 다 줘도 못 바꿔", 조선일보, 2024.3.26일자. A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