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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전환의 성공과 실패

대선 | 2024.11.21 03:23 | 조회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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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책 전환의 성공과 실패


어떤 조직이든 리더가 자신의 정책과 노선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한 경우에는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중대한 상황 변화가 나타났을 때 정책 전환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일관된 정체성과 정책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 전환 역시 리더로서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젠하워와 케네디의 방식

1950년대 아이젠하워 정부는 냉전 직후였기 때문에 군사 분야를 중심으로 한 대외원조 정책을 실시했다. 그런데 스탈린 사후 소련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가 늘어나면서 미국의 대외정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1955년 반둥에서 비동맹회의가 탄생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높아졌다. 이에 전문가들은 대외정책의 개편을 요구했다.


                            정체성·일관성 중요하지만 위기 극복 위한 유연성도 리더의 덕목

                            케네디, 쿠바 미사일 위기 맞아 최대한 의견 수렴하고 국민과 소통

                            1970년대 남북 화해 시도, 곧이은 유신으로 정치적 목적 의심받아

                            미 행정부 교체로 한국 정책 변화 불가피…성공적 전환 사례 연구를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등과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있다. [사진 존 F 케네디 기념도서관]


아이젠하워 정부는 기술원조를 포함한 경제원조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원조 비용이 늘어남에도 단기 무상원조에서 장기 유상차관으로 원조정책을 바꾸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용한 정책전환은 이후 미국의 대외원조를 바꾸는 초석을 놓았다. 군사비 절감을 위해 핵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아이젠하워는 퇴임연설에서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1961년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에 대해 미국 국민은 열광했다.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이 인기를 끌었고, 매카시즘에 지친 시대였다. 케네디는 1960년대를 번영과 개발의 시대로 선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흐루쇼프는 젊은 케네디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 했고, 냉전의 최전선인 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했다.


케네디는 위기의 상황에서 국가안보회의에서 최대한 많은 의견을 수렴했다. 상황을 투명하게 국민에게 알렸고 흐루쇼프와 핫라인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 직접 베를린을 방문했다. 여기에서 케네디는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효과를 보지 못한 카터와 아들 부시

코리아게이트가 터진 직후에 시작된 카터 행정부는 인권외교와 평화를 내세우며, 미·중 수교와 중동 평화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란과 니카라과에서의 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이어지면서 주한미지상군 철수를 연기했고, 남북미 3자회담이 취소되었다. 이란 대사관 인질을 구하기 위한 작전은 투입된 헬리콥터의 추락과 함께 실패했다.


취임 직후 9·11 테러가 발생했던 부시 대통령은 강경한 대테러전쟁을 선포했다.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시작했으며, 미북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2006년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한 직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북정책 담당자를 교체하고, 북한 핵문제에 대한 연착륙 정책으로의 전환하였다.


결과적으로 부시 행정부의 전환은 그에 상응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으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테러를 근절하기보다는 이슬람국가라는 또 다른 테러세력이 나타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베트남 이후 최대의 실패를 맛보았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아들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안보위기에서 7·4 공동성명으로

한국 역시 외부 환경으로 인해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가장 극적인 전환은 1970년대 초의 대북정책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동서 화해 정책이 시작되면서 1970년 8·15 경축사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협상 가능성을 선언했다.


남북적십자 회담, 남북 간 밀사 파견, 그리고 7·4 남북공동성명과 6·23 선언으로 이어졌다. 통일의 원칙에 대해 남북 간 최초의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북한과 함께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것은 물론 북한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와도 남한이 수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당시의 정책전환은 20년 후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의 초석을 놓았다.


국민들은 이러한 변화에 환영하기도 했지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 사건, 북한의 EC 121기 격추, 대한항공 납치 사건 등 긴장이 끊이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대북 정책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전환의 논의 배경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울러 같은 시기 유신이 선포됨으로써 정책전환이 정치적 목적 하에 이루어졌다는 의심을 받으며,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신군부가 추진한 데탕트

노태우 정부의 정책 전환 역시 극적이었다. 신군부의 일원이었던 대통령의 정책은 이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민간인의 북한 방문으로 공안 정국이 조성되었다. 전두환 정부 시기 못지않은 강경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7·7 선언을 통해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7·7 선언은 당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었던 해외주둔 미군 재편 정책과 조화를 이루었다. 주한미군 감축, 한국군 평시작전권의 한국 정부로의 이양, 그리고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철수에 이르기까지 한미 양국은 커다란 갈등 없이 정책적 전환을 추진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남북은 1991년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에 합의했고, 소련, 중국과 수교를 하였다.


정책적 전환에 대한 저항도 적지 않았다. 군사문화를 비판했던 기자가 테러를 당했고, 졸업식에 참석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경례를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정책 기조를 이어갔고, 김영삼 정부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국내정치에 발목 잡힌 김영삼 정부

장기수가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급속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조문 파동과 주사파 논쟁이 일어났다. 미국 정부는 북핵 문제에 대한 제네바 합의를 하였지만, 김영삼 정부는 대북 강경책을 고수했고, 미북 제네바 합의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럼에도 북한의 경수로 건설을 위한 비용은 한국 정부가 대부분 지불해야 했다.


가장 최근의 정책 전환은 박근혜 정부 시기였다. 대통령은 중국 방문 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중국어로 연설했고, 중국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전기가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정부 간의 중요한 논의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신호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2015년 중국의 70주년 전승절에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서 올라가는 장면을 끝으로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2015년 말 갑자기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에 합의했고, 2016년 미국의 미사일 방어 전략인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사드의 한국 배치에 반대하는 중국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성공한 정책전환의 조건

국내외 상황의 변화로 정부와 지도자의 정책과 노선이 바뀔 수 있으며, 바뀌어야 한다. 닉슨은 보수주의자였지만 중국을 방문했고,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수교를 한 것은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전환이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우선 전환의 과정이 성공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정부의 전환은 전문가들의 숙의와 사회적 담론을 수용했고, 정책전환 과정에서 그 배경과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카터 정부의 정책전환은 외부의 상황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즉자적 전환이었고, 박근혜 정부의 정책 전환은 그 이유가 투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내부의 정치적 문제로 인한 전환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문 파동으로 대북정책에 변화를 주었던 김영삼 정부의 정책전환은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 초 안보정책 전환 역시 내부적 국정전환, 즉 유신선언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닉슨 행정부의 통상무역정책에 대응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미국의 행정부가 바뀐다.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큰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안보뿐만 아니라 산업정책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정부가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정책전환이 모두 성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성공적인 사례의 조건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시기이다.

                                                           <참고문헌>

  1. 박태균, "상황 따른 정책 전환은 당연, 중요한 것은 숙의와 투명성", 중앙일보, 2024.11.19일자.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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