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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적거

대선 | 2024.11.28 02:50 | 조회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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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의 적거


이제 가을은 곧 그 끝에 이르고 머잖아 눈보라의 계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난주에 제주 추사관에 다녀왔다. 제주 추사관은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다. 추사관 옆에는 추사(秋史)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추사관을 찾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제주에 살며 가끔 들르던 곳이었다. 추사관을 찾아가는 길에 보니 곳곳에서 귤 따기가 한창이었다. 노지의 귤을 수확하는 시기를 본격적으로 맞았다. 밭에서 캐낸 돌로 쌓은 밭담이 검고 길게 보였고, 밭담이 빙 둘러싼 밭에는 양배추와 마늘이 심어져 있었다. 추사관 건물 주변에는 수선화가 한 뼘은 됨직한 높이로 자라 있었다. 겨울에도 푸른빛이 사라지지 않는 곳이 제주임을 실감했다.


                                                제주 대정에서 유배 살았던 추사

                                                교유와 수행의 기록 남겨져 있어

                                                적거 기록에서 삶의 가치 되새겨


추사는 55세가 되던 1840년부터 약 9년간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사계절 내내 바람이 많고, 또한 습한 곳에서의 적거(謫居)였다. 금번에는 추사관에 들러 세한도(歲寒圖)는 물론 추사가 남긴 서화(書畵)를 예전보다 유심하게 살펴보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추사가 남긴 시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추사가 각별하게 사랑했던 꽃인 수선화를 그린 추사의 그림도 눈여겨보았다. 수선화의 구근을 제법 크고 실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때 척박한 땅에서도 굴하지 않는 생명의 강인함을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의문당(疑問堂)’이라고 쓴 현판 글씨와 ‘은광연세(恩光衍世)’라고 쓴 편액 글씨는 단연 눈에 띄었다. 의문당은 의심이 나는 것을 묻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주 대정향교 학생들의 공부방인 동재에 걸었던 현판 글씨였다. 의문을 갖는 것으로부터 학문이 시작되니 문답을 주고받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당부가 담긴 듯했다. 은광연세는 은혜로운 빛이 세상 가득 넘칠 듯이 퍼진다는 뜻이다. 제주 김만덕의 공덕에 대해 듣고서 그의 후손에게 써 준 편액 글씨였다. 김만덕은 제주 사람으로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자 자신의 재산으로 육지의 쌀을 사와 사람들에게 나눠 준 거상(巨商)이었다. 글방에서 글을 배우는 아이들을 위해 현판 글씨를 쓴 일이나 백성을 구휼한 거상의 정신을 기리고자 편액 글씨를 쓴 일을 통해서 볼 때 추사가 비록 혹독한 귀양살이를 했으나 지역의 사람들과 더불어서 살고자 했고 또 무언가를 베풀려고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주에서 유배를 살 때 추사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바다를 건너 제주에 온 이후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한두 가지에 그치겠는가. 얼굴빛과 말에 표시 내지 않고 순리에 따라 지나가고자 한다.” 추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먹고 입는 것에서부터 있음을 몸소 겪었다. 그만큼 생활을 해가는 일이나 마음을 온전히 지켜가며 사는 일이 어려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는데, 다만 추사는 순리를 따름으로써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데 추사가 남긴 서화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새롭게 접하게 된 것은 추사가 귀양을 살면서 사경(寫經)을 했다는 것이었다. 사경은 불교의 경문(經文)을 베껴 쓰는 수행법인데,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옮겨 적은 추사의 사경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마음속에 지닐 때 관세음보살의 보살핌을 받게 되고 온갖 고난으로부터 구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설한다. 보문(普門)은 모든 방향으로 활짝 문이 열려 있다는 의미로 직역할 수 있다. 다른 글에서도 추사가 지계(持戒), 즉 불교의 계를 지키려고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사경을 하면서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고 애썼다는 점은 매우 이채로웠다.


요 며칠 사이에 추사의 서화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추사는 외롭고 힘든 유배생활 속에서도 이웃한 사람들과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고, 또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가꾸려고 부단하게 애썼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궁구해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닐까 싶었다.


추사는 이후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해배되어 과천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살았다. 이 시절에 쓴 시, 그리고 시에 붙인 문장이 있는데 특히 시에 덧붙인 글이 인상 깊었다.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늙은 부부의 촌집이 옥수수밭 가운데에 있는데, 부부는 만족해하며 살고 있어 나이를 물으니 일흔 살이라고 답한다. 서울에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또 물으니 관가에 들어가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무엇을 먹고사느냐는 물음에는 옥수수를 먹는다고 한다. 이에 추사는 “나는 남북으로 정처 없이 떠돌고 바람에 흔들리다가 늙은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서 망연자실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이 문장의 탄식에서 나는 뭉클해졌고 또 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참고문헌>

  1. 문태준, "추사의 적거", 중앙일보, 2025.11.27일자.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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