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입니다“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5년 전 1919년 4월 1일 유관순(1902~1920, 향년 18세) 열사가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관순 열사는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충남 공주에 위치한 영명학당(현재 공주영명고등학교)에 다니다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1871~1972, 향년 101세, Alice Hammond Sharp)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했다.
유 열사가 다니던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했다. 여기에 유 열사도 참가해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던 와중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의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유 열사도 시위에 참여해 서울 남대문 인근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유관순 열사는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 금방 풀려났으나 3.1 운동이 국내 곳곳으로 확대되고 학생들의 참여가 늘어나자 일제는 1919년 3월 10일 휴교령을 내린다.
이에 학교를 갈 수 없게 된 유 열사는 고향(현재 천안)으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왔어도 유 열사의 독립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마을 곳곳에 서울에서 발생한 3.1 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아우내 시장(현재 병천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그렇게 유 열사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펼친다. 이날 시위엔 참가자 3000여명이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일제는 이러한 평화적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로 화기를 난사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 19명, 부상자 30명이 발생했다. 또 많은 사람이 일제 헌병들에게 연행됐다. 유 열사 또한 헌병에게 연행돼 공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일제로부터 징역 5년형을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수검되고 말았다.
아울러, 유 열사와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부친 유중권(1863~1919, 향년 55세) 열사와 모친 이소제(1875~1919 향년 43세) 열사는 일제 헌병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순국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 열사는 대한제국 황태자 영친왕(1897~1970, 향년 72)의 결혼 기념(일제 왕족과 정략결혼) 특사령으로 형기가 1년 6개월로 단축됐다. 하지만 영양실조와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 열사는 18세 나이로 순국했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거부했다. 이화학당 교장 월터(1885~1977, 향년 92세, 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했다.
유 열사는 10대 소녀이자 학생이었다. 일제는 모진 고문으로 유 열사의 육체는 쓰러뜨릴 수 있었으나, 대한독립을 향한 의지와 애국충정의 정신은 꺾지 못했다. 다음은 당시 나이 18세 유 열사가 형무소에서 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귀와 코가 잘리고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