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에 생각해보는 공(空)
있어 보이는 생각 중에 유무(有無)에 관한 것도 있지만 ‘공(空)이란 무엇인가’도 있다. 최근 어느 일본 영화에서 청년의 팔뚝에 새겨진 ‘空卽是色’(공즉시색)이란 문신을 보다가, 영화가 스크린에 현출된 빛의 집합이듯, 저 살도 실은 다 텅 빈 것이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간 내 가공할 소신은 ‘빌 空’에 압도적으로 집착해서 공이란 그저 내 육안으로 못 볼 뿐 핵과 전자 사이가 텅 비어 있는 원자 구조처럼, 모든 물질이란 텅 빈 것이라고 여기는 정도였다.
얼마 전 영월 다녀오다가 어느 휴게소에서 커피 마시며 노자 사부님께 질문하였다가, 공에 대한 그간의 거대한 착각이 와르르 붕괴되는 경험을 하였다. 나만 몰랐고 그대들이 저마다 알고 있는 공이란 그게 아니었다. 공이란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고정된 본성이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本無自性). 공을 두고 눈앞의 실체가 텅 빈 것, 몸은 우주 먼지의 집적(集積)에 불과하다는 건 번지수를 거꾸로 짚은 말이었다.
공이란 빈 컵이든 벽돌이든 그 어떤 구체적 실체가 아니라 개념이다. 그저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는 관계의 형식이다. 축구공은 있어도 공이란 물체는 없다. 다만 ‘空함’이 있을 뿐이다. 시간 내에서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함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러니 空은 虛, 無로 기우는 게 아니라 차라리 充, 滿에 기대는 글자였다. 그랬다. 공 때문에 세상은 허무하고 덧없는 상태가 아니라 공 덕분에 세계는 충만하고 황홀한 현상으로 전변하는 곳이었다.
나의 착각이 붕괴될 때, 그 무너진 곳에서 번개같이 떠오른 생각이 있다. 공은 모든 순간을 다 마지막으로 만들어준다는 것. 동시에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것. 이런 공한 관계로 인해 모든 찰나는 고유하고 엄숙하게 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공은 무심하고 심심하던 일상의 순간들을 기억 속에 무너질 탑으로 우뚝 세워주었다.
어쩌면 공은 고개일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마지막을 연출하는 곳인 고개. 조금이라도 높은 그 고개는 길 위에 있는 것을 더욱 들어 올린다. 고개가 나그네를 받들 듯 공은 풍경을 시간의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그 고개에서 모두의 모든 순간을 마지막으로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공<이갑수, “부처님오신날에 생각해보는 공(空)”, 경향신문, 2026.5.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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