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선거 이후를 말하다
지난 주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볼레스와프 코미네크(Bolesław Kominek) 추기경의 기념비 앞에 섰다. 동상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용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1965년 폴란드 주교단이 독일 주교단에게 보낸 서한의 한 대목이다. 전쟁과 점령, 학살과 추방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시절이었다. 피해자의 자리에 있던 폴란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민주주의는 선거로 시작하고 선거 이후엔 절제로 유지돼 “용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갈등이 깊을수록 잊지 말아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산정권은 그를 반국가적이라고 몰아붙였고, 상흔이 깊게 남은 폴란드 사회 안에서 독일을 향한 화해의 언어는 너무 이른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 서한은 대화와 화해를 통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편, 폴란드의 국경 안전을 확보하려는 도덕적, 외교적 결단이기도 했다. 이 편지는 훗날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이어진 유럽 화해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도덕적 씨앗이 되었다.
용서는 약자의 언어가 아니다. 정치에서 용서는 값싼 도덕도 아니다. 피해를 입은 쪽이 먼저 손을 내미는 일, 자기 편의 분노를 감수하는 일, 아직 화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미래를 말하는 일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복수는 빠르고, 동원은 쉽고, 분노는 즉각적이다. 반면 용서는 느리고, 오해받기 쉽고, 배신으로 보인다.
오늘은 지방선거일이다. 선거에는 늘 승자와 패자가 있다. 세상에 세 가지 쓸쓸한 사람이 있다. 전쟁에서 진 장수, 사업에서 망한 기업가, 그리고 선거에서 떨어진 정치인이다. 잔인하지만 선거의 현실을 보여주는 말이다. 선거에는 실력과 준비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대의 공기, 상대의 실수, 그리고 운이 따라야 한다.
선거는 민의의 향배를 분명히 보여준다. 어디에서 피로감이 커졌는지, 어떤 말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지, 누가 다음 무대에 남을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선거로 시작하지만 선거로 끝나지 않는다. 선거는 승자에게 권한을 준다. 그러나 그 권한이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민심은 방향을 보여주지만, 법과 제도를 마음대로 재단할 정당성까지 주지는 않는다. 승자의 진짜 시험은 “얼마나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서 멈출 수 있는가”에 있다. 패자는 일단 말이 적어야 한다. 자기 편끼리 먼저 “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치면 위로가 아니라 면피다. 패배 직후의 구구절절 긴 말은 다음 길을 막는다. 조용히 딛고 일어나는 힘은 침묵 속에서 생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다른 체제보다 강한 이유는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흡수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최소한으로 제어해온 장치가 바로 법과 제도다. 거기에 손을 대는 일은 눈앞의 목표보다 훨씬 큰 괴물을 만들어낸다. “나의 이익을 가장 잘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바뀌는 그 괴물은 종종 ‘정의’라는 이름으로도 포장된다.
지금은 확증편향의 시대다. 사람들은 원하는 정보만 골라 보고, 알고리즘은 그 선택을 더 단단한 프레임으로 굳힌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맹목적 추종, 냉소와 조롱이 상대를 대하는 기본 언어가 되었다. 뒤틀린 적대감과 우월감, 열등감이 뒤섞인 사회에서 용서와 절제를 말하는 것은 먼 나라의 낡은 언어처럼 들릴 지 모른다.
“우리는 용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 말은 모두가 좋은 사람이 되자는 도덕 교과서의 문장이 아니다. 갈등이 깊을수록 누군가는 먼저 정치의 언어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긴 쪽이 상대를 완전히 밀어내는 대신 손을 내밀고, 진 쪽이 변명보다 복기를 먼저 하고, 모두가 제도를 전리품처럼 다루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조금 더 오래 버틴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이런 말은 코웃음거리가 되기 쉽다. 조정하는 사람보다 불을 붙이는 사람이 더 각광받는다. 대중성, 휘발성, 단기간의 수익이 보장되는 말이 공론장의 절대선처럼 취급된다. 갈등을 줄이는 말은 싱겁고, 상대를 찌르는 말은 빠르게 퍼진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는 공론장의 중심을 잡아줄 “어른”이 필요하다. 훈계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편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긴 사람에게는 멈추라고 말하고, 진 사람에게는 조용히 다시 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원래 많지 않았고, 이제는 더 적어졌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물러났고, 어떤 이들은 등에 칼이 꽂혀 끌려 내려왔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고독한 역할을 다시 해야 한다.
오늘 선거가 끝나면 승자는 민심을 말할 것이다. 다만 그 민심이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다. 패자는 억울함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조용히 복기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거로 시작하지만, 선거 이후의 절제로 유지된다. 그리고 때로는 용서의 용기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브로츠와프의 동상 아래 새겨진 그 문장은 지금 한국 정치에 가장 낯설고 불편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낯설고 불편한 말이 사라질 때, 정치는 가장 익숙한 싸움으로 되돌아간다.<이재승, “민주주의, 선거 이후를 말하다", 중앙일보, 2026.6.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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