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갚는 사람이 바보 되는 세상
“맘대로 해, 맘대로! 짜증 나 죽겠네.” 최근 빚 독촉 현장에서 기자가 들은 말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빚을 갚지 않은 채무자였다. 보통 빚 독촉을 받는 처지가 되면 위축되거나 숨기 마련이다. 기자도 채권 추심인과 동행하며 ‘집 앞까지 찾아온 추심인 앞에서 채무자가 얼마나 기가 죽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오판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채무자들은 당당하다 못해 당혹스러울 정도로 뻔뻔한 모습을 보였다.
빚을 갚지 않고 버텨본 경험이 한두 번 아닌 듯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특히 ‘개인회생’을 무기처럼 꺼내 들었다. 개인회생을 신청하면 추심 절차가 중단된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개인회생 신청 건수는 2021년 8만1030건에서 지난해 14만9146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채무자는 “빚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고 묻는 채권 추심인에게 “아무래도 개인회생 신청하지 않을까요?”라고 답하며 웃기도 했다. 민망함이나 죄책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개인회생이 마치 채무자들의 손쉬운 비상구가 된 듯했다.
이날 채권 추심인의 추심 현장을 동행하며 들은 채무자들의 답변은 기상천외했다. “당신이 보이스피싱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빚을 갚으라 마라 합니까!” “나도 받을 돈이 있는데 그거 받으면 갚을게요” 등등. 오히려 채무자가 더 당당해 보였다.
왜 빚을 갚지 않아도 당당한 사회가 된 것일까. 추심인들은 “정부가 연이어 내놓고 있는 빚 탕감 정책의 영향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채무자 중에는 개인 사업 관련 빚이 10억원이 넘는 지방의 한 사립대 이사장도 있었다. 이 자산가 입에서 나온 말은 “어차피 정부가 빚 탕감해 줄 텐데 기다리겠다”였다. 빚을 져도 갚지 않아도 되는 세상, 오히려 빚을 갚는 사람이 바보가 된 세상, 이것이 과연 정상인가.
이렇다 보니 채무자들이 당당하게 나오는 건 당연하다. 조금만 버티면 정부의 또 다른 빚 탕감 조치들이 나올 테니까. 한 채무자는 채무 감면을 받고도 남은 빚을 갚지 않고 있었는데,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해외 여행을 다녀온 듯한 사진이 가득했다. 상환 능력이 있어도 갚지 않고, 갚지 않아도 당당할 수 있는 사회. 이 모든 것이 빚 탕감을 남발하는 정부 정책의 결과다.
금융 취약 계층을 구제하고 불법 추심 행위를 막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금융 시장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 더 절실하다. 지금처럼 선심 쓰듯 이뤄지는 빚 탕감은 신용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다. 정부 정책이 ‘채무 면제’라는 손쉬운 처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스스로 빚을 갚아 나갈 수 있는 건강한 경제 생태계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땀 흘려 빚을 갚아 나가는 이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정부는 정책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한영원, “빚 갚는 사람이 바보 되는 세상”, 조선일보, 2026.6.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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