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학평론의 선구자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
팔봉 김기진(1903~1985)은 청주가 낳은 천재 문인이다. 팔봉이 없는 한국 현대문학사는 기초 없는 성곽이나 마찬가지다. 팔봉의 평론은 시, 소설, 수필을 인식과 형상이라는 기본적 요건에서 한국문학을 현대적으로 진화시키는데 단단한 주추를 놓았다는 평가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팔봉 김기진(1903~1985)
“내용만 있고 형식을 무시하는 것은 마치 알맹이 없는 껍질을 숭배하거나, 뼈대만 있고 살이 없는 인간을 살아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참된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최고의 사상을 가장 완전한 예술적 형식 속에 녹여내야 한다.”
이 말을 프롤레타리아문학의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팔봉은 <내용과 표현>(조선문단 1927. 4.)에서도 내용과 표현의 조화를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높은 사상도 온전하게 전달하려면 예술적 형상이 필수요건이란 말이다. 또 팔봉은 비평가를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 문학이 나아갈 바를 가리키는 지남차로 봤다.
팔봉이 1924년 발표한 평론성 수필 ‘백수(白手)의 탄식’에서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했다. 행동하지 않는 카페 지식인들을 향해 던진 일갈은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카페의 의자에 앉아서 혁명을 속삭이는 자들아,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구나! 희고 흰 팔을 뽐내며 입으로만 민중을 말하는 너희들의 헛된 탄식이 아프다.”
이 말은 당시 낭만주의나 감상주의에 빠져 있는 지식인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와 다를 바 없다는 연대 의식의 출발점이 됐다.
청학이 내리는 팔봉리
팔봉의 고향을 찾아간다. 서원구 남이면 팔봉리는 팔봉산 서쪽 기슭에 다소곳하게 들어앉았다. 여덟 봉우리가 좌청룡 우백호 혈맥을 이뤄 듬직한 어깨처럼 마을을 감싸 안은 길지(吉地)이다. 팔봉이 현대 평론의 선구자라면 두살 터울 형인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은 현대 조각예술의 선구자다. 팔봉리는 두 형제의 예술혼을 품은 것만으로도 길지임이 틀림없다.
팔봉2리 마을회관을 찾아 마당에 차를 세웠다. 마을은 한가하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작가 金基鎭(김기진)의 고향’이라는 표석을 찾는다. 이 표석은 1993년 8월에 ‘우리문학기림회’가 세웠다. 회원으로는 ‘이영구, 김효자, 고임순, 이명숙, 이명재, 허형만’으로 돼 있다.
표석은 작고 초라하다. 회관 앞에 서성이는 경주김씨 노인의 말을 빌리면 처음에 팔봉1리의 김복진, 김기진 생가에 설치해 놓은 것을 집 주인이 파서 버렸다고 한다. 그것을 팔봉2리 주민들이 수습해서 마을회관 마당에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 십여년 전 나는 이 표석을 팔봉전원교회 마당에서 만났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그 딸이 어느 대학교 선생이었다는데 지금은 와보지도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성악가 김복희 교수를 말하는 것 같았다.
팔봉 1리 김기진 생가
팔봉의 생가는 팔봉1리에 있다. 팔봉전원교회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아담한 팔봉1리 마을이 나온다. 팔봉1리는 최근에 사람들이 드나듦이 많아졌다. 김기진·김복진 생가를 최근 오헨리 교수가 한국 최초의 근대조각가 김복진 생가라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켜서 조각 작품 전시와 여러 가지 행사를 열고 있다. 또 팔봉산의 여덟 봉우리를 일주해 김복진의 묘소에 이르는 ‘김복진 순례길’을 개척해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미술계에서 김복진을 부각시키는 바람에 문인 김기진은 슬며시 수면 아래로 숨어버리는 분위기여서 아쉽다.
바람도 충청에 이르면 청풍이 되고/ 달빛도 청원에 이르면 명월이 되나니/ 세상빛 모이어 뫼 이룬/ 이 팔봉에 내리는 이/ 그대 바로 청학이었음을-조철호 시 ‘팔봉에 청학 내리어’ 중에서
김복진 생가 개관식 때 조철호 시인이 낭독한 시이다. 관장인 용인대 문화콘텐츠학과 오헨리 교수는 “김복진 선생님은 개척자예요. 우리나라에 조각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을 때 근현대 조각, 서구식 조각을 들어온 거죠”라고 말했다. 나는 팔봉은 근현대 평론이 거의 없을 때 서구식 평론의 모델을 들여온 사람이라 말하고 싶었다.
마당으로 내려섰다. 청학이 날아든 자취를 찾는다. 슬레이트 지붕 너머로 팔봉산이 보인다. 팔봉리의 동쪽에 병풍을 두른 듯 서 있는 팔봉산은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다. 여덟 봉우리의 정기를 받아 여덟 명의 큰 인물이 날 거라는 전설이 있다. 팔봉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다. 정관, 팔봉 형제가 현대조각, 현대 평론의 선구자이니 이미 팔봉리에는 걸출한 두 예술인이 탄생한 것이다. 상량문으로 생가가 확인되고 탐방로가 개설된 후 여기서부터 김복진 묘소까지 걸어본 적이 있다. 만만찮은 거리였다.
팔봉은 보통학교 입학하기 전 다섯살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어느 산줄기 어느 논두렁을 밟았을까. 형제 중에 세상과 마을 사람들의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쪽은 동생 팔봉 김기진이다. 그의 호가 고향의 이름을 딴 ‘팔봉(八峰)’이기도 하려니와 한국 근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받아 짊어진 인물이기 때문이리라. 팔봉은 함경도 군수였던 아버지 김홍규와 어머니 김현수 사이의 4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형 복진과 함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8세 때 다시 아버지를 따라 황간으로 옮겨가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0세 때 아버지가 영동군수로 옮기자 영동공립보통학교 2년에 들어갔다. 그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박영희와 사귀게 됐다.
●프로문학운동
사회주의 문학 이론을 수용하다. 배재학교를 나와 1921년 일본 릿쿄오대(立敎大) 영문학부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노동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1923년 5월 형인 김복진과 박승희, 이서구, 박승목, 김을한, 이제창 등과 극예술단체인 토월회를 만들었다.
이듬해 귀국하여 귀국공연도 했으나, 2차 공연을 끝으로 탈퇴했다. 그후 동경유학생과 백조 동인들이 주축이 되어 계급주의 문학단체인 ‘파스큘라’를 만들어 ‘인생을 위한 예술’을 내세우는 문예운동을 벌였다. 프롤레타리아 문예 운동의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팔봉은 1925년 파스큘라와 염군사를 합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를 만들어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김기진, 박영희, 이상화, 김창술, 박팔양 등의 시, 최서해, 조명희 등의 소설, 김영팔, 김우진 등의 희곡이 이 시기의 신경향파 문학으로 일컬어진다. 1926년 박영희와 내용과 형식의 논쟁 이후 KAPF의 주도권은 박영희, 임화 등에게 넘어갔다. 이때 임화와 예술대중화논쟁을 벌이면서 평론을 많이 썼다.
1923년 평론성 수필 ‘프로므나드 상티망탈’을 <개벽(開闢)> 7월호에 발표하였다. 팔봉은 이 수필의 결미에서 “모든 계급적 구속을 타파하고,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나가자, ‘프로’의 깃발 밑으로”라고 외친다. 감상적 산책을 넘어 ‘계급적 각성과 실천’을 최초로 선언한 문학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을 계급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사회로 인식하면서 유물사관에 입각해 문화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국 초기에 쓴 이 글을 시작으로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를 비롯한 평론을 발표해 비평문학의 틀을 다졌다. 클라르테 운동이란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에 의거해 현실을 분석하고 탐구함으로써 문학을 창작하는 방식으로 신경향파 문학의 ******점이 됐다.
그의 프로문학운동은 사회주의 문학이론을 수용했을 뿐 사회주의혁명에는 동참할 수 없다는 다소 모순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치적인 사회주의 운동과 거리를 두고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운동이었기에 임화와 결별하게 됐을 것이다.
이 수필 한 편을 읽어본다.
7월 6일부터 갱생하여 9월 28일 서울의 완전 탈환을 본 뒤에 10월 2일 첫 외출에서 우인을 만나 7월 2일 나의 봉변 현장의 광경을 그로부터 들었다. “나는 두골의 타박을 당하고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면서 넘어지더니 조금 후에 기신(起身)해 처참한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하면서 나무토막을 한 개 집어 들고 3보 전진하자 호령과 함께 이번에는 후방에서 두 명의 장한이 출현하여 난타하니까 나는 전도(顚倒)하고 말더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놀랐다.-김팔봉 수필 ‘내가 무엇을 알리오’ 중에서
이 작품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팔봉은 남로당 사람들에게 끌려가 인민재판을 받았고 죽음에 이르렀다가 극적으로 살아났다.
수필은 진솔한 자기 고백이다. 이 글로 미루어 보면 팔봉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오해다. 초기에는 사회주의 문학이론가였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는 계급문학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문학의 자율성과 예술성을 강조하는 문학 중심의 활동으로 전환했다.
●문학사에 실천적 족적을 남긴 문인
팔봉은 1938~1940년 매일신보 사회부장을 하면서 흔들렸다. 이때의 흔들림으로 팔봉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멍에를 벗지 못하고 힘들게 살았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함께 겪어야 하는 아픔이지 팔봉에게만 책임 지우며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팔봉 김기진과 문인들.
팔봉은 평론, 시, 소설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을 발표했다. 1920년대의 젊은 평론가로서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자신이 직접 작품을 창작하면서 인식과 형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문학적 실천을 보였다. 그러한 점에서 문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에 투신한 문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봉의 흩어져 있던 그의 작품은 세상을 떠난 뒤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김팔봉문학전집>을 전 7권으로 펴내면서 정리됐다.
오월의 해가 팔봉산 자락에 저녁 햇살을 쏟아 붓는다. 팔봉산 높은 언덕에 있는 정관의 묘소라도 올라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만뒀다. 팔봉은 경기도 포천의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고향의 언덕에 와서 형제 예술인이 함께 누워 있게 될 날을 그려본다.<이방주, “현대 문학평론의 선구자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 동양일보, 2026.7.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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