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범 산업부장
韓 AI 초호황에 달러 블랙홀로
수출 1조 달러 세계 네 번째로
전세계 럭셔리 한국 진출 러시
여기저기서 한몫 달라 아우성
횡재후 경제파탄 덫 피하려면
현실 직시하고 체질 개선해야
전 세계 럭셔리 브랜드들이 앞다퉈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세계적 슈퍼카 업체인 이탈리아 페라리 본사는 페라리코리아를 별도로 세우고 한국 사업을 직접 챙기고 있다. 럭셔리카 대명사인 영국 롤스로이스는 한국 시장만을 위해 디자인된 한정판 모델 ‘블랙 배지 고스트 청담 에디션’을 출시하는 등 한국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탈리아 최고가 가구 브랜드 플렉스폼은 예술품에 빗댄 신제품을 밀라노가 아닌 서울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대한민국이 인공지능(AI) 초호황으로 돈벼락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빅테크들이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앞다퉈 나서면서 전례 없는 메모리 공급 부족 사태가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어지고 있다. K반도체 산업은 중동 오일산업에 빗댈 만큼 맹렬한 속도로 달러를 빨아들이고 있다.
한국은 올해 ‘연간 수출 1조 달러(약 1343조 원)’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1948년 첫 수출액이 1900만 달러에 불과했던 나라가 78년 만에 미국·중국·독일에 이어 네 번째로 신기원 달성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분명 축하할 일이지만, 국내외 사정을 둘러보면 들떠 있을 때가 아니다.
반도체 달러로 두둑해진 K지갑을 노린 해외 기업 공세도 러시를 이루고 있다. 글로벌 외식업계 큰손인 미국 치폴레 멕시칸 그릴은 지난 2일 아시아 첫 매장을 한국에 열었다.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을 표방하는 치폴레는 4000여 매장을 두고 있다. 프리미엄 차 사업을 하는 중국 차지는 지난 4월 국내에 매장 3곳을 동시에 열었다. 차지는 7400여 매장을 두고 있다. 중국차 공세는 더 매섭다. 지난해 1월 진출한 BYD는 수입차 판매 4위권에 올라선 데 이어 올해 연간 1만 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 고급차를 표방하는 지커는 지난 6월 사전예약 판매 한 달 만에 1000대를 넘어섰다.
요즘 삼성 반도체·SK하이닉스 직원들이 인당 수억 원에 달하는 반도체 성과급과 기대감에 아파트는 물론 명품 가방·테슬라 전기차·애플 아이폰 등을 샀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상대적 박탈감에 한 몫 떼 달라는 아우성도 커지고 있다. 성과급 노사 갈등은 조선·철강 등으로 번지고 있다. 포스코 노조가 요구하는 바를 모두 합산하면 지난해 영업이익 80%에 달하는 수준이라는 계산도 나온다. 관세를 볼모로 한 미국의 투자 압박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향후 5년간 한국 정부·기업의 미국 투자 규모는 약 48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준비되지 않은 돈벼락은 재앙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남태평양 나오에로공화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 세계 농업을 지탱하는 비료 필수원료인 인광석 채굴로 1970∼1980년대 벼락 부국에 올라 국민소득 세계 1위 자리를 꿰차기도 했다. 무상교육·의료는 물론 연 1억 원 기본소득을 지급할 정도로 돈은 넘쳐났고, 도로 위에는 페라리 같은 슈퍼카가 가득 찼다. 하지만 무분별한 채굴과 자원 고갈, 국토 황폐화로 지금은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59년 북해 천연가스 유전 발견으로 돈벼락을 맞았던 네덜란드도 고물가와 제조업 붕괴로 한때 경제 파탄 직전까지 몰렸다. 경제학자들은 ‘네덜란드병(病)’ ‘성공의 함정’ 등으로 부른다.
반도체 초호황은 영원하지 않다. 미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마의 5%’ 구간을 장기간 이어가면 전 세계 가계와 기업, 정부는 경제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빚을 내서라도 천문학적인 AI 투자에 경쟁적으로 뛰어든 빅테크 CEO들 사이에선 벌써 위험성을 빌미로 한 ‘속도조절론’ 목소리가 커진다.
수출 1조 달러에 취해만 있으면 경고는 현실이 될 것이다. 중국에 발목이 잡힌 자동차·철강·석유화학 산업의 고부가가치 전환을 서두르고 차세대 수출 산업을 키워야 최대 취약점인 K자 양극화 병을 고쳐나갈 수 있다. 정부는 호남 반도체 공장 건설에만 목을 매고 있지만, 총대를 멨던 김용범 전 청와대 정책실장 퇴진으로 맥이 풀린 모양새다. 정부와 여권은 산업 육성이라는 깜빡이를 켜고 있지만, 우리나라만 발목을 잡고 있는 주 52시간 근무제의 ‘첨단산업 예외’는 뒷전인 채 기업 규제만 쏟아내는 방향으로 운전을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운전대를 바로잡지 않으면, 경제 교과서에 ‘한국병’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이관범, "반도체 돈벼락, 재앙 될 수도 있다", 문화일보, 2026-9-16일자. 30면.>
이관범 산업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