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백석의 시(詩) ‘수라(修羅)’를 가르치다가
“교육은 우리가 이 세계를 충분히 사랑하여 그것에 책임을 질 것인지 결정하는 지점이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교육의 위기」 中.
한나 아렌트는 미국의 정치 철학자로 나치의 대표 전범으로 유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기자로 참석해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집필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교육의 위기」(1954년)라는 저서에서 보수, 진보와 같은 이론적 프레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교육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책에서 전체주의 교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 교육의 목적은 신념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이든 형성할 능력을 파괴하는 데 있었다.”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할 능력 자체를 잃게 만드는 것’이 전체주의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해석해 봅니다.
OTT, SNS, 숏츠, AI 등 기다리고,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 없이 ‘나’를 충족시켜주는 문명의 이기들이 단군 이래 가장 똑똑하다는 세대를 가장 생각 없는 세대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나칠 정도의 ‘과도한 자유’, 교육을 이끌어 나가야 할 교사의 전문성과 권위가 무너진 ‘교권의 위기’, 진지한 배움 대신 기술적 학습이나 형식적 교육으로 일그러진 ‘배움의 변질’은 이미 한나 아렌트가 반세기 이전에 묵시록처럼 던진 화두는 오늘날의 현실에도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생각 없이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아이히만의 문제는 지금 우리 아이들, 아니 우리 모두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저는 문제의식을 가져봅니다.
요즘 아이들은 당연한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경험이 일반화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 기성세대들은 삶이 어려웠던 부모 세대 밑에서 겪은 유년 시절의 결핍이 다음 세대에게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뭐라도 여력이 되는 한 가진 것, 입는 것, 먹는 것, 배우는 것 다 부족함 없이 해주며 키우려고 노력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한다면 다음과 같은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네팔 산사태 희생의 전 지구적 책임과 선진국에서 시작된 미성년자의 SNS 사용 금지 등은 우리 시대의 교육의 패러다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소중히 여겨 다음 세대에게 온전하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의지와, 아이들을 이 세계에 잘 적응하고, 자신들이 살아갈 세상을 고쳐나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며,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결정적인 수단이자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해 봅니다.
사학자 닐 하우(Neil Howe)는 저서 「제4의 대전환」에 따르면 역사는 80~100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합니다. 100여 년 전에는 전체주의의 광풍으로 2차 세계대전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이후 세대의 고립과 고독 속에 타인과 세계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스마트폰만이 친구가 되어 집중과 진지한 사유와 판단 능력이 약화된 우리 아이들과 AI의 광풍에 생각과 사유를 외주화 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은 전체주의의 야욕을 키워오는 그 누군가의 좋은 양분이 되지 않을까요?<하종필, “단상(斷想): 백석의 시(詩) ‘수라(修羅)’를 가르치다가”, 충청타임즈, 2026.9.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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