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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

신상구 | 2026.10.02 13:35 | 조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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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잣말

 

                  납득 못해 분하고 상처받은 기억 안에서 곪아 고름 짜내듯 구시렁

                  몇 년 묵은 앙금 털어낸 메일에 사과 글 보내며 또다시 혼잣말

                  소심한 분풀이로 더할 나위 없어 쪼잔해지는 것 같지만 즐기기로

 

  혼잣말이 자꾸 는다. 길 가다가 혼자 중얼거리고, 운전하면서도 자꾸 말을 한다. 교통사고가 나서 블랙박스에 녹화된 소리를 누가 듣게 된다면 별 이상한 친구도 다 있다고 하겠다 싶어 말하다 말고 말소리를 줄이기도 한다. 남과 말할 일이 줄어들면서 생긴 버릇일까? 납득되지 않은 일에 분했던 기억, 생각지 못한 뒷말로 받은 상처,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은 일들이 내 안에 곪아 있다가 고름을 짜내듯 말하게 된다. 말할 바에야 당사자 앞에서나 하면 조금 분이나 풀릴 텐데 혼잣말로 구시렁거린다. 결국, 전하지 못할 말을 혼자서 허공에 던지려니 소심하고 못났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에 혼잣말을 하는가? 얼마 전 제출했던 논문에 대한 심사서에서 전체 논지는 타당하나 글 전체가 두괄식 문장이니 미괄식으로 고치는 것을 권한다며 게재 불가 판정을 받고, 그 심사평 때문에 한동안 혼잣말을 했다. 네 논문은 어쨌거나 실어줄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 한 것인 줄 잘 알지만, 그 말에 분개해서 나는 그가 내 앞에 있다고 가정하고 혼잣말을 했다. 참고로 나는 문장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혼잣말은 어차피 가닿지 않을 언어니까 내 분도 풀면서 그와 직접 충돌할 일도 없으리라는 안정감을 주기 때문일까? 혹은, 만에 하나 불쑥 대면의 기회가 왔을 때 조금 더 조리 있게 따지기 위해 연습해 둘 필요가 있다고 믿어서일까? 나도 그 까닭을 잘 모르겠다.

  “자네 행동을 보니 그간 내게 많이 서운했던 모양인데, 대체 내가 자네에게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나? 혹시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나의 경멸을 느꼈던 겐가?” “혼자 정의로운 척 다하더니, 당신의 정의란 것이 고작 이런 것이었군.” “그만큼 누렸으면 됐지, 무얼 천 년 만 년 누리겠다고.”

  늦은 점심을 혼자 먹고 있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저편 좌석에서 30대 여성 다섯이 수다를 떠는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잦고 또 컸다. 남 흠잡는 얘기가 한참 이어졌다. 슬슬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며 식사를 하는데, 급기야 입에 담기 힘든 더러운 이야기까지 한다. 비위가 상해 먹다 말고 숟가락을 놓고 나왔다. 나오다가 결국 못 참고 몇 마디를 했다. 내 혼잣말은 한동안 그때 내가 화만 내지 말고 이렇게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며 그 상황을 복기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50여 년 전 중학교 때 세운상가에 고장 난 카메라를 고치러 갔다. 셔터가 눌러지지 않았다. 쓱 보더니 수리점 주인이 그때 돈으로 5000원을 내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카메라를 잠깐 열었다가 셔터 부분을 한 번 돌리자 바로 고쳐졌다. “얼마예요?” 내가 물었다. 이렇게 쉽게 고쳤는데 다 받겠느냐는 뜻이었다. 그가 나를 빤히 보더니 갑자기 욕을 했다. “어린 ××가 벌써부터 그런 거나 배웠냐? 5000원이라 그랬는데 금방 고치니까 값을 깎으려고? 너 보기엔 잠깐만에 고쳤지만, 내가 이 자식아! 이걸 배우려고….” 그의 폭언은 결국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라는 데까지 수위가 올라갔다.

  지금까지도 50년 전의 그 폭력적인 기억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때는 왜 아무 말도 못 했을까? 그때 내 행동이 정말 나라의 미래를 걸고 욕먹을 일이었나? 그래서 또 복기를 시작해서 중학생 소년으로 돌아가 50년 전의 분풀이를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렇게 보면 내 혼잣말의 이력은 꽤 오래됐다. 부당한 일, 납득 못 할 상황,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그 말 그 일이 끝내 바로잡히지도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대체로 혼잣말을 한다.

  한번은 외국에 있을 때 한 번 잠깐 만났던 어느 분에게서 귀국 후 몇 해 뒤에 불쑥 메일이 도착했다. 그때 택시를 타고 모임 장소로 이동하면서 당시에 내가 자기에게 했던 말이 너무 모욕적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할수록 불쾌하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말한 상황을 떠올려 보니 친밀감을 느껴 가볍게 건넨 농담이었는데, 그는 내가 자기를 염치없는 사람으로 여겨 퉁을 주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의 몇 년 묵은 앙금에 대해 내가 꼼짝없이 사과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또 혼잣말을 했고, 몇 년 뒤에까지 이메일을 보내 직접 분을 푼 그이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늘어가는 혼잣말은 말의 무력감 때문이다. 오해를 풀려고 꺼낸 말은 늘 더 큰 싸움이 되고, 충정으로 건넨 말 때문에 분노가 더 커진다. 이러다가 저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우겨대는 독불장군이 될까 겁난다. 늘어가는 혼잣말을 생각하다 보니 늙어가며 자꾸 쪼잔해지는 느낌이 든다. 말하고 싶지 않고, 말하기도 뭣해 혼자서 말한다. 그래도 소심한 분풀이로는 혼잣말처럼 경제적인 것이 없다. 정신의 건강을 지켜주고, 서늘한 분노도 재워준다. 그래서 자꾸 느는 혼잣말을 더 즐기기로 작정했다. 어차피 상대에게는 들리지도 않는데 뭘.

  혼잣말은 한자로는 독언(獨言)이다. 유광익(柳光翼·1713∼1780)은 ‘독언록(獨言錄)’을 남겼다. 신흠(申欽·1566∼1628)은 ‘산중독언(山中獨言)’이란 글에 벼슬에서 쫓겨나 낙향해 있을 때 했던 혼잣말을 글로 적어두었다. 글에서 그는 ‘세상의 변고를 하도 많이 겪고 보니 점점 옛 역사를 들춰보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썼다. 역사 속에 평온한 날보다 어지러운 시절이 더 많아서다.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사람들의 속이는 마음인데, 큰 화복을 겪고 나면 정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런 말 속에는 뭔가 가슴에 서려둔 뜻이 담겼다. 마음에 지나가는 생각을 혼잣말로 떠드는 것보다 이렇게 글로 담아두는 것이 훨씬 점잖아 보인다. 나도 혼잣말을 글로 써 볼까?<정민, “혼잣말.”, 문화일보, 2026.10.2일자.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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