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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한가위 달빛 아래에서

신상구 | 2026.10.02 14:10 | 조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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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한가위 달빛 아래에서

 

  추석이 가까워지면 산과 들은 조금씩 제 빛깔을 바꾼다. 푸르던 나뭇잎 사이로 열매가 여물고, 들녘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곡식이 고개를 숙인다. 계절은 풍요를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한 해의 결실을 헤아리듯 자신의 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얼마 전 맛있는 기행에서 제천 의림지 시비공원을 찾았다. 천년의 물길을 품은 의림지는 오랜 세월 제천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 온 곳이다. 여기서 이곳 제천 출신 원서 오탁번 시인의 「밤」이라는 시비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제천 시비공원에 있는 오탁번 시인의 '밤' 시비.


  오탁번 시인은 1943년 충북 제천 백운면에서 태어나 시와 소설, 동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우리 문학에 독특한 자취를 남긴 작가다. 대학교 교수로 오랫동안 후학을 가르쳤고, 1966년 동아일보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시, 1969년 대한일보 소설 신춘문예에 잇달아 당선되며 문단에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그는 고향 백운면 애련리의 폐교된 애련분교에 원서문학관을 세우고 문학의 터전으로 가꾸었다. 문예창작 교실을 시작으로 문을 연 문학관은 문인들의 교류와 창작을 위한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아이들의 교실이었던 공간에 문학 자료와 육필 원고가 쌓이고, 운동장에는 시비와 자연의 풍경이 어우러져 하나의 정원이 됐다. 아이들의 배움터였던 곳이 이제는 시를 꿈꾸는 이들의 쉼터로 변모했다.

 

                        

                                   원서문학관 전경. 하나의 정원 같은 모습이다.

 

   원서문학관을 떠올리며 의림지 시비공원에서 만난 오탁번 시인의 「밤」을 추석을 맞이하여 다시 읽어 본다.

 

  「밤」은 짧은 시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가을 들녘처럼 풍성한 생의 철학이 담겨 있다.

 

   시는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에서 시작된다. 산소로 향하는 길목의 밤나무 아래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이 토속적인 한마디는 풍성함과 넉넉함, 그리고 고향의 정취를 단숨에 불러낸다. 어린 시절 추석 무렵이면 밤송이를 발로 밟으며 알밤을 주워 담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소를 짓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오탁번 시인의 「밤」은 단순히 향수를 노래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밤송이를 까면서 그는 진지하게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뚜렷하다.” -오탁번, 「밤」에서

 

   '앉음앉음'이라는 아름다운 토박이말 속에는 저마다 다른 생김새와 사연이 담겨 있다. 반듯하게 여문 밤도 있고, 속이 비어 있는 쭉정밤도 있으며, 뒤틀린 회오리밤도 있고, 두 개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쌍동밤도 있다. 사람 사는 세상 또한 다르지 않다. 누구는 평탄한 길을 걷고, 누구는 굴곡진 운명을 살아간다. 어떤 이는 풍성한 열매를 맺지만, 어떤 이는 이루지 못한 꿈을 품은 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 어느 삶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모든 밤이 저마다의 모양을 지니고 있듯, 모든 인생 또한 그 나름의 의미와 존엄을 지닌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따뜻한 긍정과 연민이 배어 있다. 오탁번 시 특유의 해학과 생명 의식이 은은하게 스며 있는 대목이다.


                          

                                      제천 의림지 근처에 있는 시비공원 모습.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서로를 비교하며 살아왔다. 남보다 더 큰 열매가 되기를 원했고, 더 반듯한 모습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연은 처음부터 모든 밤을 똑같이 만들지 않았다. 다름은 결핍이 아니라 생명의 본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가 더욱 깊어지는 것은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이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인간이 밤송이를 까듯, 하느님 또한 우리의 생애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다는 상상은 경이롭고도 숙연하다. 그것은 심판의 눈길이라기 보다는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는 따뜻한 시선처럼 느껴진다.

   누구의 삶도 똑같지 않으며, 어떤 인생도 단 하나의 잣대로 설명될 수 없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익어 온 시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닌 생애의 무늬이다.

   올 추석에는 한가위 달빛 아래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 걸쳤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래 묻어 두었던 내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면서 나 자신의 껍질을 한 겹쯤 벗겨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의림지에서 만난 오탁번의 「밤」은 이런 이유로 내게 추석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설렘이 되었다.

   한가위 달빛 아래서 정성스레 알밤 하나를 까듯, 내 생애의 속살을 따뜻하게 마주하는 시간. 그것이 이 시 「밤」이 건네는 가을의 선물인지도 모르겠다.<방경태, “추석 한가위 달빛 아래에서”, 금강일보, 2026. 9.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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