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단의 80년 애국
애국을 말할 때 흔히 드는 사례가 해외 유대인의 중동전 참전이다. 아랍인이 징집을 피해 나라를 탈출할 때 유대인은 참전하려고 거꾸로 해외에서 입국하더란 것이다. 이에 뒤지지 않는 사례가 재일 교포 청년들의 6·25 참전이다. 민단의 모집에 642명이 참전해 인천·원산 상륙 작전, 장진호 전투, 백마고지 전투에서 싸웠다. 어쩌다 격전지만 골라다녔는지 무려 135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242명은 일본 정부가 재입국을 거부해 가족과 생이별하는 비극을 겪었다.
경제적 애국에서도 민단계 재일 교포는 유대인에 버금간다. 한국 산업의 모태가 된 구로공단은 원래 재일 상공인을 유치하려고 만든 산업 단지다. 일본에서 기업을 일군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자가 공단 창립위원장을 맡아 자금을 끌어왔다. 재일 교포 곽태석 회장의 싸니전기공업(현 써니전자)을 시작으로 초기 공단의 절반 이상을 재일 교포 기업인이 채웠다. 이들의 기여는 얼마 후 구미공단으로 확장됐다. ‘한강의 기적’에 마중물이 됐다.
북한을 향한 조총련의 경제 애국도 대단했다. 자금력이 막강했던 1990년대 초까지 연간 최대 8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했다. 민단은 투자 자금, 조총련은 충성 자금이란 점이 결정적 차이다. 한국에 들어온 민단 자금은 신한은행·롯데그룹처럼 모국에서 큰 열매를 맺었지만, 조총련 자금은 김일성 일가 사금고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조총련은 교포 돈을 빨아먹는 북한 정권의 빨대에 불과했다. 이 차이가 민단의 승리와 조총련의 몰락을 이끌었다.
민단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계사에 남을 만한 소수 민족 인권 투쟁이다. 한복을 입고 한국어로 말하는 학교를 일본에 만든 조총련이 재일 교포 인권 운동을 주도했을 듯하지만, 전혀 아니다. 북한은 교포를 김일성의 신민으로 여겼기 때문에 일본 사회에 동화될 수 있는 권리 획득에 부정적이었다. 재일 교포 지문 등록, 공무원 임용 제한, 금융과 주거 차별 문제에 항의하고 철폐 운동을 주도한 것은 민단계였다.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이 80주년을 맞아 7일 서울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연로한 교포들이 일본 각지에서 오느라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창단 후 처음 서울에서 행사를 연 것은 모국의 관심과 애정이 줄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모국의 가장 큰 보답은 민단의 80년 애국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한다. 장담컨대 선진국으로 발전한 모국을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할 사람들이다.<선우정, “단의 80년 애국”, 조선일보, 2026.10.7일자.>



댓글 0개








